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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川舜氏 都始祖 舜吉(古朝鮮)
  • 올린이 : 김연구원 ( 2021.09.13 13:11 ; From : 115.136.113.8 )
  • 조회 : 244 회
  • 舜氏 중국 河東(산서성 태원부의 송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전해지는 본관: 林川舜氏 坡州舜氏 順興舜氏

    顓頊高陽氏-窮蟬-敬康-句芒-蛟牛-鼓叟-舜重華(2070년~2200년),舜象
    春秋时晋國大夫舜華之后,以祖名爲氏。春秋时晋國有賢大夫舜華,其后代子孫以祖名舜爲姓,稱爲舜氏의 子 舜商均


    순임금은 顓頊의 6代孫으로 姓이 ‘虞’ 또는 ‘有虞’氏다. 그래서 흔히 ‘虞舜’이라 부르며, 이름은 ‘重華’다. 그는 冀州 사람으로 부친은 瞽叟다. 고수는 맹인이었다(고수는 맹인이 아니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란 의미에서 고수라 불렸다는 속설도 있다).
    순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고수는 다시 아내를 맞이하여 아들 象을 낳았다. 고수는 무도했고 어머니는 험담을 잘했으며 상은 교만했다. 가족이 모두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순은 항상 공손하게 자신의 도리를 잃지 않고 효도를 다하였다.

    순은 나이 스물에 효성이 지극하다고 소문이 났고, 서른에 四岳의 추천을 받아 堯임금으로부터 시험을 받게 된다. 요는 娥皇과 女英 두 딸을 순에게 시집보내 그의 행동을 관찰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홉 아들을 그에게 보내어 받들게 했다. 순은 가정생활이 근엄하였으므로 두 딸은 고귀한 신분임에도 순의 가족에게 오만하게 대하지 않고 부녀자의 도리를 다했다. 아홉 아들 역시 더욱 성실해졌다.

    그가 歷山에서 농사를 지을 때 그곳 주민은 모두 서로 밭의 경계를 양보했고, 雷澤에서 물고기를 잡자 순의 덕에 감화되어 사람들이 서로에게 잘 잡히는 장소를 양보하게 되었다. 또 河濱에서 그릇을 구웠는데, 그곳에서 생산되는 그릇은 하나도 조악한 것이 없게 되었다. 순이 사는 곳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1년이 지나자 촌락이 이루어졌고, 2년이 지나자 읍이 되었으며, 3년이 지나자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에 요는 순에게 옷과 거문고를 하사하였고, 창고를 지어주며 소와 양을 상으로 주었다.

    한편, 고수는 여전히 순을 죽이려고 했다. 하루는 순에게 창고에 올라가 흙을 바르게 하고 아래에서 불을 질러 창고를 태워버렸다. 순은 양손에 삿갓을 들고 이것을 이용하여 뛰어내려 죽음을 면하였다.

    그 후에 또 고수는 순에게 우물을 파게 했다. 순이 우물을 파들어 가자 고수는 상과 함께 흙을 퍼부어 우물을 메워버렸다. 하지만, 순은 몰래 옆으로 구멍을 파놓아 이것을 통해 나올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도 순은 더욱 정중하게 아버지를 섬기고 동생을 사랑해주었다.

    순은 이처럼 신중하고 어질며 지혜로웠다. 온화하고 공손하며 진실하여 숨은 덕이 조정에까지 들리니, 이에 제위를 이으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삼가 五典을 아름답게 하라 하니 오전이 잘 지켜졌고, 백규(百揆)08의 직책을 맡기니 그 직무를 잘 처리하였다. 四門에서 제후들을 영접하게 하니 사문에 화기가 넘쳐흘렀고, 大麓(큰 산의 기슭)에 들여놓았으나 매서운 바람과 뇌성을 동반한 폭우 속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烈風雷雨不迷]

    이에 요는 순이 천하를 물려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요임금이 말했다. “그대 순에게 이르노라! 일을 묻고 말하는 것을 살펴 그대의 언행이 공적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아온 지 3년이 되었노라. 이제 그대가 제위에 오르도록 하시오.” 순은 겸양하여 이를 사양하고 제위를 잇지 않았다.
    요는 이제는 늙어 정사를 돌볼 수 없다고 여겨 순에게 천하의 일을 대행하게 하고 사방을 다니며 시찰하였다.
    순이 천하의 일을 맡아 행할 때 법을 정해 일정한 형벌을 내리고, 잔혹한 오형(五刑)09을 유배형으로 대신하여 형벌을 너그럽게 했다. 채찍으로써 官에서 내리는 형벌을 삼고, 종아리 치는 것을 교화의 형벌로 삼았으며, 벌금으로 몸에 가하는 體刑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과실과 재난 때문에 지은 죄는 용서했으나, 지은 죄를 끝까지 뉘우치지 않을 때는 사형에 처했다. 형벌은 오직 긍휼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여 담당 관리들에게 삼가고 또 삼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공공[共工: 百工)을 관장하던 인물]을 幽州로 유배 보내고, 驩兜: 요임금의 신하)를 崇山에 유배 보냈다. 三苗를 三危山쪽으로 축출하고, 鯤을 羽山에서 참하였다(곤은 우임금의 아버지로 치수에 실패한 책임을 물어 죽였다). 이처럼 네 죄인을 단죄하자 천하 사람이 모두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순이 등용되어서 일한 지 20년이 되자 요는 그에게 섭정하도록 하였다. 순이 섭정한 지 8년 만에 요임금이 붕어하였다.(순의 나이 58세) 요의 삼년상을 마치자 순은 요의 아들 丹朱에게 제위를 양보하였으나 천하 사람들이 모두 순에게 귀의하였다.(61세에 천자의 제위에 오름) 순은 22명의 大臣에게 각자 직분을 맡겨 3년마다 한 번씩 그들의 공적을 살폈고, 세 번 살핀 결과에 따라 강등시키거나 승진시키니 백관(百官)들의 공적이 하나같이 올라갔다.

    대신 중에 특히, 臯陶는 大理가 되어 공평하게 판결을 내리자 백성이 각기 심복하고 實情을 사실대로 토로하게 되었다. 伯夷가 禮를 주관하자 위아래가 모두 겸양해졌고, 垂가 工師가 되니 모든 工人들이 직분에 충실하여 좋은 물건을 만들어 냈다. 益이 산림과 川澤을 관리하자 산과 연못·하천이 개발되었고, 棄가 농사를 관장하자 여러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났다. 契이 司徒를 주관하니 백성이 서로 화목하였고, 龍이 賓客 접대를 주관하니 멀리서도 사람들이 이르렀다. 12州의 장관들이 힘써 일하니 나라 안의 백성이 도망하거나 명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그중에서 특히 禹의 공이 가장 컸으니, 전국의 아홉 개 산을 개간했고, 아홉 개의 호수를 통하게 했으며, 아홉 개의 강 물길을 통하게 했고, 九州를 확정했다. 각 지방은 그 직분에 따라 조공을 보내왔는데, 모두 그 지역의 실정에 맞게 하였다. 영토는 사방 5,000리로 荒服까지 이르렀다. 戎, 氐, 羌 등 동서남북의 여러 부족을 회유하여 사해(四海) 안이 모두 순의 공적을 숭앙하게 되었다. 이에 우는 구초(九招)20라는 음악을 짓고 진기한 물건을 헌상하니 봉황이 날아와서 맴돌았다. 천하에 덕을 밝힌다는 것은 모두 순임금의 시대로부터 비롯하였다.
    순이 제위에 올라 수레에 천자의 깃발을 꽂고 부친인 고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그 모습이 매우 공손하여 자식의 도리 그대로였다. 동생 상을 제후에 봉하였다. 舜은 아들 商均이 또한 불초하다 하여 미리 하늘에 우를 천거하고 17년이 지나 남쪽 지방을 巡狩하다가 蒼梧의 들에서 붕어하였다.
    요임금을 이어 제위에 오른 지 39년 만이었다. 그를 江南의 九疑山에 장사 지냈으니, 이곳이 零陵이다. 삼년상을 마치자 우 또한 순의 아들에게 제위를 양보했다. 그렇지만 제후들이 모두 우에게로 돌아왔다.
    그런 연후에 우는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요의 아들 단주와 舜순의 아들 商均은 모두 봉토를 얻어서 그것으로 선조에게 제사를 받들었다. 그들은 천자의 아들로서 신분에 맞는 복식을 갖추어 입었고, 예악도 신분에 맞게 행하였다. 그리고 賓客으로 천자를 만났으며, 천자도 그들을 신하로서 대하지 않았으니, 우임금이 감히 권력을 독점하여 전횡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은 『尙書』의 「虞書」와 『史記』 「五帝本紀」의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기 위해 역사의 현장을 두루 다녔다. 요와 순임금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지역에서는 그곳의 長老들이 요순의 덕을 칭송했고, 다른 지역에 비해 風敎(풍속이 교화된 모습)가 남다름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상서』에는 결손된 부분이 많은데, 그 산실된 부분들이 왕왕 다른 저작에서 발견되고, 『春秋』와 『國語』를 보면 「五帝德」과 「帝繫姓」을 잘 천명해 놓은 점을 확실히 알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여러 책에 기록된 내용이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사마천은 이러한 여러 사료를 수집하여 검토하고 비교적 정확하고 합리적인 사실들을 추려서 요순에 대해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다.
    구체적인 역사 시기를 추정할수 있는 夏나라의 시작을 근래의 학자들은 대략 기원전 207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나라 왕조의 시작이 우임금이므로 순임금은 기원전 2070년~2200년 사이로 볼수 있다. 이때는 신석기시대로 칠무늬토기가 사용되었으며 씨족마을연맹에 의한 공동체가 유지되던 원시 국가 형태의 시기로 추정된다. 우리나라는 이때 檀君이 고조선을 개국한 지 100여년이 되는 무렵이었다.
    순임금의 두 부인에 대해 『상서』와 『사기』는 대략 그 이름만을 기록하고 있다. 위진남북조시대 魏나라의 張華(232-300)가 지었다는 『博物志』에는 “洞庭湖 안에 있는 산에 요임금의 두 딸이자 순임금의 두 왕비인 아황과 여영이 살고 있는데, 이들을 湘夫人이라고 한다. 순임금이 죽자 두 왕비가 흘린 눈물이 대나무에 떨어져 대나무에 온통 얼룩무늬 반점이 생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슬픈 전설 같은 이야기에 따라 반점이 있는 대나무를 ‘瀟湘斑竹’ 또는 ‘湘妃竹’이라고 부른다.
    ▲ ① 상비묘(湘妃墓) ② 소상반죽(瀟湘斑竹) ③ 2비도(二妃圖) 출처: 중국

    우리나라 舜氏人口 40가구 12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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