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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祖上을 찾읍시다.<萬姓氏族史編>
  • 올린이 : 김연구원 ( 2021.03.31 18:54 ; From : 115.136.113.8 )
  • 조회 : 994 회
  • 한자(漢字)’는 중국 글자가 아니다,

    한글을 세종대왕 혼자서 만들었다면 이또한 고조선(가림토) 고구려 3국시대가 없다, 세종실록에 훈민정음을 만들때 고전에서 따왔다고 하였다,
    훈민정음(한글)은 단군조선의 가림토 문자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아무런 고증 없이 동이족(東夷族)이 한자를 만들었다는 학설 자체를 극력 부정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중국이 한자를 BC 2300년경부터 사용했다고 한다 이시기가 바로 고조선시대이다,

    "한자는 동이족이 만든 문자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소"
    대만학자 서량지(徐亮之)박사가 한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한(韓)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을 대표하여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겠습니다. 받아주십시오." 하고는 한국식으로 넙죽 큰 절을 올렸다 한다.

    대만 문자학자 이경재(李敬齋)도 동이족이 한자(漢字)를 창조했다면서, 순임금과 함께 한자를 만들었다는 창힐(蒼頡)도 동이족이며 공자도 동이족인 은나라 후예라는 주장 등 상당수 중국학자들은 은(殷)대의 갑골문이 당시 황하 이북의 북방민족인 동이족이 만들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다.

    일본학자 가지마 노보로는 “한족(漢族)은 한(韓)을 흉내 내어 이름붙인 것이며, 특히 양자강 유역은 전통적으로 동이족의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으며,

    심지어 중국도 자신들의 최고신화인 반고개천(盤古開天)와 한족(漢族)의 기원을 규명한 학술연구지에서 “한족은 동이족을 주류로 묘족(苗族)을 지류로 구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민족 문명학
    토기·청동기·암벽 등서 유사한 문자 발견… 삼국유사·용비어천가 등 고문헌에도 실재 흔적,

    세종실록엔 ‘훈민정음이 옛 전자 모방했다’고 기록…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 사학자였던 권덕규(權悳奎)는 단군 고조선 시기부터 고려 시대까지 신지문자를 비롯하여 고유 문자가 존재

    고조선 황화 유역에서 이주민 밝족이 商(상=殷·은)을 건국한 후 고중국어를 표기하는 ‘한문자(漢文字)’를 발명하여 오늘날의 한문이 되었다.

    15세기 전반기에 들어와서 드디어 조선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새로운 알파벳이 발명되어 모든 우랄·알타이어족 언어와 세계 모든 언어를 쉽고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는 세계 문자가 창조되었다.

    고중국에서는 고조선의 신지문자를 ‘창힐(蒼힐)문자’라고 호칭하기도 했다. 고려시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라는 서책이 암자에 남아 있었음을 기록했다.

    세종 때 편찬된 ‘용비어천가’에서는 ‘구변지국(九變之局)’의 ‘局’을 주석하면서 ‘구변도국(九變圖局)’을 신지(神誌)가 편찬한 도참서(예언 서적)의 이름으로 설명했다.
    ‘세조실록’에서는 신지비사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라고 기록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와 ‘영변지(寧邊誌)’에는 신지문자 16자가 채록되어 있다.


    萬姓氏族史編, 祖上의 上 先系를 찾아서

    高麗時代 잃어버린 姓氏祖上의 上系를 찾아서

    朝鮮中期 以後에는 中國을 憧憬하는 ‘慕華思想’에 따라
    各 門中이 族譜를 編纂할 때 自己 집안 始祖의 淵源을 中國과 結負시킨 事例도 많은 것으로 報告되고 있다.

    憲德王 8년(816)에) 凶年과 大饑饉 7년(815년 新羅西쪽 邊方) 浙東地方으로 건너가 求食한 사람이 170人이었다. (『三國史記』 卷10 新羅本紀 憲德王 8년)

    顯宗代 兵部尙書 歷任 張延祐의 父 張儒 瀛州 尙質縣(高敞郡 興德面)도 이 時期 戰亂을 避하여 吳越國에 移住하였다가 還國 하였다,

    ① 吳越國의 文士 酋彦規가 來投하였다. (󰡔高麗史 卷1 世家 太祖 2년 9월 癸未)
    ② 吳越國의 文士 朴巖(來源이 新羅로 되어 있다)이 來投하였다.
    (高麗史 卷1 世家 太祖 6년 6월 癸巳)

    通志氏族史 : 酉氏:黄帝十四子之一姓也
    中國에는 아예 酋氏라는 姓 自體가 없었기에. 酋彦規가 新羅人이거나 新羅人의 後裔였다

    張延祐는 瀛州 尙質縣 사람인데, 新羅 末年에 아버지 張儒가 吳越로 避亂을 하였다가 後에 還國하였다. 光宗은 그가 中國말을 理解한다 하여 여러 차례 客省의 職에 任命하고 中國 使臣이 오면 그로 하여금 接待하게 하였다. 『高麗史』 卷94 列傳 皇甫兪義傳附 張延祐傳

    彭城金氏少昊金天氏后裔 <彭城金氏宗譜>
    金日磾 弟 金伦之后
    遠祖 : 金仁山,謚文安.
    始祖 : 金萬全,字榮三.
    高源始遷祖 : 金華九 ; 金華十六.
    唐代 金忠儀,新羅人,德宗朝 官將軍。
    宋代 金文剛,休寧(今屬安徽)人,
    官 龍圖閣直學士;金彥,邵陽(今屬湖南)人,
    元代學者 金履祥,書法家金元舉。
    明代 學者金問,散曲家金鑾。
    明末清初 著名文學批評家 金聖嘆,
    清代書畫家 金農,
    中和殿大學士兼吏部尚書加太傅金之俊,
    畫家金侃,學者金榜,詩人金和,史學家金門詔。
    臺灣的金姓 逐 漸向南移遷,先後遷居安徽、江蘇、浙江、以至福建、廣東等。
    清康熙三十三年武秀才的金首聲(臺灣金氏的開基始祖),
    散居地 : 浙江省金華縣等地.

    南陽葛氏 葛毛侯- 葛南成[고려문과] 熙宗2년(1206) 丙寅榜 丙科 高麗高宗2년(1215년) 司錄兼掌書記- 葛南寶- 葛莫立-葛得先,葛善-(葛蔓亨-葛世德-葛金孫-葛年春,葛連福-葛明-葛一連-葛信雄,葛次雄-葛枝興-葛有道 -葛禮敏,葛善敏,葛天敏-

    昌原仇氏 仇賁-仇都-仇勝- 仇成吉-仇千壽-

    潭陽鞠氏鞠受圭[고려문과] 高宗15년(1228) 戊子榜 明經-鞠成允-

    咸悅宮氏 宮昌 太祖 4년(921년) 百濟에서 高麗歸化

    南昌巨氏始祖 巨興-巨身-

    遂安桂氏 桂富 郎將(忠烈王1280년)-桂文庇-

    京兆歸氏 歸評 -歸夫-
    고려 육전(D)수전(B)정치(B)모략(D)명성(D)축성(C)
    태조원년 618년 6월 인사에서 한찬 도항사령(都航司令)을 제수받았다. 도항사는 수군의 함대를 건조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奉化琴氏始祖 琴容式- 琴克儀(琴儀)-琴輝-琴應倫-琴 薰-琴允義-琴遇工-琴用和,琴以和-琴滌,琴淑-琴克諧,琴克和-琴柔-

    川寧堅氏始祖 堅金- 堅權(高麗開國功臣)-堅述(術)- 堅守-堅一 -堅思齊(都官佐郞 恭愍王)-堅成實-堅成貴- 堅希福-

    全州甄氏始祖 甄萱-甄神劍-甄惟綽 [고려문과] 睿宗 2년(1107) 丁亥榜 同進士. 良醞令同正,- 甄惟底(低)- 睿宗10년(1115) 7월 宋나라에 가서 大學에 入學하였으나, 現地死亡

    淸州慶氏慶鼎相-慶柱洪-慶奇俊-慶甫-慶珍-慶大升-慶蕃-慶綏-慶補(慶臻.慶儀)-慶斯萬-慶復興,慶千興-慶弘-慶補-慶儀- 慶習-

    泰仁景氏 景琮-景訓-景磋-景光侑-景寅-

    沙川耿氏始祖 耿甫- 耿緯 [고려문과] 禑王 8년(1382) 壬戌榜 後牓

    曲山昌原孔氏 孔斌(孔子의 7世孫)-孔尙義- 孔巖-孔愉-孔紹-孔府- 孔達-孔成吉-孔頎-孔穩-孔臣月寸-孔斯文-孔宗周-孔輔碩-孔殷孫-孔世賢-孔允丘-孔仁貴-

    曲阜孔俯(~1416년(태종16)) [고려문과] 禑王2년(1376) 丙辰榜 丙科 兄孔伯 弟孔俶 父孔紹
    曲阜孔頎 [문과] 世宗29년(1447) 丁卯 式年試 丁科 父孔成吉 祖孔達 曾祖孔俯
    後馬韓

    昧谷의 豪族 龔直將軍<燕山龔氏> 諡號 奉義, 一牟山郡(燕山郡) 攻略, 白城郡 祿邑(安城),長子 龔直達 次子 龔金舒 三子 龔咸舒佐尹, 四子 龔英舒의妻 俊行의女
    景琮 高麗前期 淸州昧谷(新羅景德王때 昧谷(忠北 報恩 懷仁 昧谷城)의 豪族(大相,司空,三重大匡 龔直(?~939년(태조22)의 妻 景琮의 누이)
    昧谷人 景琮

    德陽(幸州)箕氏始祖 箕詡-箕煜-箕釋-箕潤-箕丕-箕準-箕卓-箕翕-箕寔-箕武-箕亨-箕燮-箕勳-箕貞-箕學-箕達-箕友諒- 箕萱(竹州:弓裔時代)-

    押海江氏始祖 江朝東-
    蘇州賈氏 賈忠言-

    永平麻氏始祖 麻煖 高麗開國二等功臣

    新昌孟氏始祖 孟召 馬韓의 將軍 -孟光孟義-孟裕-孟希道-孟思誠,弟孟思謙-

    羅聰禮<初諱:宗禮>(錦城(羅州)太守 高麗三韓壁上功臣)->錦城羅氏始祖
    錦城羅氏始祖 羅聰禮-羅民-羅景純-羅孫彦-羅得璜-羅裕-羅允材-羅英秀,羅英傑-羅益禧-羅光滿- 羅世-羅興俊-羅公彦- 羅繼從(啓道)-羅織-

    咸平魯氏始祖 魯隼- 閣門使 魯作公-魯洙(高麗仁宗: 1137년 工部員外郞,左軍兵馬判官前試閤門祗侯)-魯元規-魯文腴-魯璋-魯玄受-
    魯隼 [고려문과] 文宗 34년(1080) 庚申榜 乙科
    江華魯仁復 (1373년~1432년) [고려문과] 恭讓王 2년(1390) 庚午榜 同進士 父魯輿 祖魯舒 曾祖 魯有禮

    淸海鎭(新羅興德王 3년(828) 南判官은 新羅坊을 管轄했다.
    英陽南淑孫 [고려문과] 元宗 99年未詳 試年未詳 父南三起
    固城南琴 [고려문과] 禑王 8년(1382) 壬戌榜 後牓 判廣州牧
    未詳南 夏 [고려문과] 昌王 즉위년(1388) 戊辰榜 同進士
    未詳南宣用 [고려사마] 忠烈王 10년(1284) 甲申 生員試
    宜寧南誾 甲午(?~1354년) [고려사마] 恭愍王 23년(1374) 甲寅 生員試 父南乙蕃

    八莒都氏 都彌-都喜-都陳-都繼先-都允安-都衎-都巡-都有德-都紅晶-都吉敷-都希慶-都兪-都天遇-都興-

    順天 陶氏始祖 陶成器- 陶球元-陶正欽-陶匡世-陶東明-陶天錫-陶濟萬-陶泰英 陶成器(?~1297년(忠烈王23) 郎將,將軍 1288년(충렬왕14) -

    1453년 3월 11일 琉球 國王의 使者 道安이 慶尙道의 富山浦에 到着
    固城道氏 道證-·道深-·道顯-道應善-道在昱選手

    江陵段氏始祖 段成子 -段楊爾-段干木-段弘仁-段得春-段祐-段世儒-

    萬頃杜氏 杜魯-杜遂籠-杜孟羅-杜邦-杜景升.(兄杜景吉-杜應龍) - 杜玹,杜就林,杜乙之,杜杖,杜英哲 -

    廣川董氏董彭載-
    南原陽氏 陽元貴-

    濟州良氏良之伯-良善泰-良夫-良質-良首-良文-良圭奐-良善-良醞令-良孟-

    忠州魚氏始祖 魚重翼 -魚升震-魚仲潤-魚得海-魚有沼-魚世謙-魚伯評(?~1384)- 魯哲-

    炎帝神農氏-呂尙-叱呂氏는 고쳐 呂氏.
    咸陽吕氏始祖 吕禦梅-吕林淸,(吕光有)-吕子章,吕存赫-吕稱-呂尙輔-呂渭璜-呂文和-呂克諧-
    星州吕氏始祖 吕良裕 高麗 三重大匡-吕渭賢- 呂文就-呂渭-呂克諲-

    永川(江西)榮尙(司天監)-榮儀(偉) (~1170년(의종 24) 內侍史令-

    光州 閻氏 閻丈 或은 閻文-光州牧誌-
    閻萇 高麗 太祖 元年에 義刑臺令.
    고려 육전(C)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
    태조 원년 韓粲 守義刑臺令職에 있었는데, 이흔암이 雄州를 버리고 皇都로 올라오자, 잃은 것에 대한 處罰을 要請함과 더불어 그에게 叛亂의 뜻이 있음을 密告하였다.
    義刑臺는 나라의 法律關係의 事務를 맡아보던 官廳.

    全州, 羅州連氏始祖 連珠
    連弓-連乙-連同<272 이벌찬>-連珍<283 百濟 擊退>-連忠<291 이벌찬>-連白<312 이벌찬>-連檍<311 高句麗와 和親推進>-連音-連石<359 이벌찬>-連珠 高麗開國功臣- 惠宗의 妃 哀伊主(連乂의 딸:高麗靖宗 1041년(靖宗7年) -<淸州豪族 連翌>- 開城慶州 連氏 大干 連乂는 新羅系의 中心地인 慶州 豪族의 딸
    新羅 10대 奈解王때 伊伐 連珍將軍이 百濟와의 싸움에서 勝戰 <三國史記> .
    全州連珠 連乂 連翌 연계장 연난성 연상구 연 면 연상수 연헌준 연천수 連相燮 連國分 連相慶

    宜寧(班城)玉氏 玉權 新羅 波珍飡- 玉恭永沙飡-玉寶高-玉達-玉環-玉純 玉全伯-玉安德-玉斯溫,玉斯美-玉沽-玉繼忠-玉世弼-玉儉-玉天柱(忠州道兵馬使)-玉礪 -玉晋輝-

    玉寶高 南北國時代統一新羅의 제35대 景德王때
    統一新羅社會의 貴族層인 六頭品 出身 沙飡玉恭永의 아들

    宜寧玉氏의 玉眞瑞
    始祖玉眞瑞는 高句麗의 要請으로 唐나라에서 派遣된 8學士中의 한 사람이다.그는 우리나라에 와서 國學의 敎授가 되어 宜春(宜寧)君에 封해지고 宜寧에 살면서 우리나라 玉씨의 始祖가 되었다. 그러나 其後의 記錄이 없어 高麗때 倉正을 지낸 玉殷鍾을 1世祖上으로 하고 本貫을 宜寧으로 하였다.

    歷代人物
    玉恩宗 玉均之 玉文亮 玉全伯 玉安德 玉斯美 玉斯仁 玉珪 玉沽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玉景鍊(옥경련) (1829 己丑生) : 文科 高宗5年(1868) 別試 乙科
    玉沽(옥고) (1382 壬戌生) : 文科 定宗1年(1399) 式年試 同進士
    玉秉觀(옥병관) (1831 辛卯生) : 文科 高宗17年(1880) 增廣試 丙科
    玉世寶(옥세보) (1649 己丑生) : 司馬試 肅宗37年(1711) 式年試 三等
    玉在溫(옥재온) (1775 乙未生) : 司馬試 純祖1年(1801) 廣試 一等
    玉穉圭(옥치규) (1766 丙戌生) : 司馬試 純祖7年(1807) 式年試 三等
    玉以琢(옥이탁) (1747 丁卯生) : 司馬試 正祖10年(1786) 式年試 三等
    玉振韶(옥진소)(1687 丁卯生) : 司馬試 景宗3年(1723) 增廣試 三等
    等 모두 9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文科 3名, 司馬試 6名)

    木川牛氏 始祖 牛廷信 員外郞 (忠烈王21년(1295)-牛承吉 慶尙道鎭撫(1358년7월15일)-牛宣佐 護軍 (공민왕14년(1365)-
    鎭川于婁大
    鎭川于琔(異名于綻)(?~1273년(원종14) [고려문과] 元宗 99年未詳 試年未詳 元宗때 通譯官

    太原能氏大匡能乂-能奐-能乂男-能哀-能式-能寔(高麗開國2等功臣)-能植-能宣-能允-能康-能律-能梵-能駿-能惠-能玄-能文/能丈-能昌-能達-

    尙州阿非知-阿直岐-阿次貴-阿子蓋-阿志泰-阿於間-

    童城異應甫-異斯夫-異善貞-異惟忠-

    幸州殷氏殷寧-殷述-殷影-殷質-殷伯- 殷質-殷貞-殷元忠,殷世忠-殷鼎-殷弘,殷弘淳-

    通津位氏始祖 位沙勿-位孝男-

    河南尉氏始祖 尉遲-尉永成-尉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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