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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으로 끌려간 貢女, 60만奴隸 ...힘없는 弱小國의 아픈 설움
  • 올린이 : 연구원 ( 2020.05.25 19:18 ; From : 211.230.86.63 )
  • 조회 : 521 회
  • 中國으로 간 女人들 / 貢女 <還鄕女>

    貢女란 貢物의 一種으로서 弱小國이 强大國에게 朝貢의 하나로 女子를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예전 高句麗나 新羅가 租貢을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조공이 하나의 국가적인 연례행사로 자리잡은것은 고려시대인 1221년부터 조선전기까지 라고 할수 있겠다.

    한국사회의 분위기는 보통 세종을 띄우는데 촛점이 맞혀져 있어서 조선 세종때에 들어서 조공이 중단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런 세종 역시도 즉위 초기에 많은 수의 공녀를 명나라에 보낸것이 사실이다.

    高麗時代때 기록된 貢女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3세기말 高麗史節要에 있다. 1274년 高麗史 節要의 기록에 따르면 원나라에서는 원나라 군인들의 아내가 될 고려여인들을 요구하였고 이에 여인 140명을 뽑아 보냈는데.여인들이 떠난후 길에는 울음소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참고로 같은해에는 제1차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이 있었다. 원나라는 젊은 고려의 남성들은 일본침공을 위해서 병사로 징집했고 여성들은 공녀로 보내졌던 것이다. 고려사에 기록된 원나라의 공녀요구는 총 80년간 50여회이지만, 공식기록 이외의 것을 합하면 수 천명의 고려여인들이 인간공물인 공녀가 되어 고향을 떠나 원나라로 끌려갔다.

    조선에 현인비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많다는 것을 알게된 명은 공녀를 더 요구했고그리하여 태종 17년(1417) 5월 조선에서는 3차 공녀선발이 있었습니다이번에는 더욱 규모를 크게하고 심사를 엄격히 할 것을 요구하여무려 600명의 여인을 선발해 뽑고 뽑아서 2명의 최종합격자(?)를 명으로 보내는데지군창군사 한영정의 넷째딸 한씨녀와 부령 황하신의 딸 황씨녀였습니다.

    여성의 외모에 대해 기록이 박한 실록에서 마저 한씨녀는 실록에 나이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고고하고 품위있게 아름다우며 황씨녀는 17세로 대단히 화려한 미모를 가지고 있다고 적었을 정도니 확실히 대단한 미녀들이긴 했던 모양이죠

    명으로 가던도중 황씨녀는 갑자기 복통을 호소합니다하지만 약도 별다른 효험을 보지 못합니다.

    황씨녀는 시원한 김치국물이 먹고싶다고 애걸하지만중국땅 한가운데서 구할수 있는게 아니어서 꽤나 골치를 썩힙니다..하지만...얼마후 황씨녀는 복통이 가시고 정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북경에 다다라 둘은 영락제를 만나는데영락제는 그녀들을 꽤나 마음에 들어했습니다만...
    사실 황씨녀가 오는 도중 배가 아팠던건 사실 임신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낙태를 위해 약을 먹어서 배가 아팟던 것이고 오는 도중 아무도 몰래 사산했다는 사실이 이후 조사결과 드러납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형부 김덕장의 옆집에 살던 조예라는 청년이었으며 공녀로 뽑히기전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으나 황씨가 공녀로 뽑혀가게 되자 형부 김덕장에게 부탁하여 정표로 황씨녀에게 빗을 건낸 정황도 적발됩니다. 

    당연히 명황실은 뒤집어졌죠...아니 임산부를 보내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라면서영락제는 열받아서 조선조정에 항의하려 합니다이 상황은 외교분쟁화 할수 있는 사안이었고 황씨녀 집안이 풍비박산날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이 소식을 들은 한씨녀가 영락제에게 찾아갑니다(한씨녀도 "강혜장숙여비"에 봉해져 있었습니다)그리고 "일국의 왕이 어찌 사사로이 여염집의 여자일까지 아시겠습니까.

    부디 그러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황씨녀에게 너무 무거운 처벌도 하지 말아주시옵소서"  라며
    영락제의 옷을 부여잡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호소하죠
     
    한씨녀의 눈물의 호소에 마음이 움직인 영락제는 항의하기로 했던 걸 없던일로 하고
    황씨녀의 처벌을 한씨녀에게 맞깁니다그러자 한씨녀는 황씨녀를 그 자리로 불러오게 한뒤 따귀를 한대 때리는 걸로 처벌을 대신하죠.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영락제가 한씨녀의 부탁을 들어준거나

    황씨녀의 과거가 드러났음에도 내치지 않고 후궁에 둔걸 보면 확실히 둘다 예쁘긴 예뻣던 모양입니다.

    이 이야기는 朝鮮王朝實錄中  太宗實錄과 世宗實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오가는 貢女와 使臣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채록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국보다 우리나라에 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특이한 경우랄까요?
        
    ( 朱元璋의 아내 또한 高麗人 韓永寮.의 딸이며, 韓確(韓石峯 韓確(千字文- 東方 第一의 名筆)의 누이로 朱元璋과 高麗妃 사이에 태어난 朱肅은 후에 永樂帝가 된다. 朱元璋이 明太祖에 卽位하기 전 또 다른 高麗妃를 맞는데 碩妃이며 含山公主를 낳는다.

    또 高麗妃의 동생 韓桂蘭은 후에 明宣宗 宣德帝의 恭愼夫人 이다.淸州韓氏文靖公派族譜에 麗妃 明 太宗 永樂帝 西成府院君永恭愼夫人 明 宣宗宣德帝上 同昭惠王后 德宗大王 西原府院君確丁巳誕降 甲子昇遐.) 永樂帝의 母親이며 朱元璋의 夫人되는 麗妃가 生産된 文靖公派 韓氏의 族譜에 高麗 中葉 (容信王后<1036>,容懿王后)를 倍出한 高麗 最高의 名門 大家이다.)

    韓國 新安 朱氏를 中國 新安 朱氏와 混同했다.
    朱元璋은 우리나라 新安朱氏族譜에 없다(李如松은 星州李氏族譜에 있다),
    朱元璋은 安徽省 鳳陽県에서 貧農의 末子로 出生. 그의 家族은 元의 末期 政治混亂期에 餓死하었고 그만이 살아남아 절에 들어가 托鉢僧. 그는 떠돌이 生活 求乞하여 먹고 살았다.

    1351년 紅巾賊 郭子興 中間 보스밑으로 朱元璋은 들어갔다. 頭角을 나타낸 그는 郭의 養女를 妻(馬皇后)로 맞았다.
    1355년 郭子興이 죽은뒤 紅巾賊의 頭目이 된 朱元璋은 이듬해 南京을 占領, 1364년엔 吳王을 自稱, 揚子江 남쪽의 江南地域을 統一하였다.

    1368년 1월 그는 南京에서 皇帝로 卽位 國號를 大明(貧農 出身의 情緖를 살려 重濃政策)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이 30萬名을 넘었다고 하니 中國 歷史上 가장 殘酷한 皇帝中 한 사람이다.

    明太祖 朱元璋 出生地가 어디인지 ?
    中國에서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傳說및 說話는 說話일뿐이다. 朱元璋(1328.10.21~1398.6.24) 雅名은 重八이며 中國의 紀錄에 安徽省 鳳陽縣 出身으로 가난한 小作農의 아들로 16세에 孤兒가 되었다고 기록하며, 飢饉을 피하기 위해 펑양에 있는 皇覺寺에 入門하여 僧侶가 되어 河北地方 一帶를 托鉢 하였다고 되어있다. 즉 安徽省 봉양현의 막연히 어디쯤에서 태어나고 최소한 그 나이면 父의 성명과 4남2녀 兄弟들 身上을 모를리 없다.


    劉伯溫(劉基 : 1311년~1375년)明나라의 開國功臣으로 朱元璋의 策士.뛰어난 謀事家로 中國 民間에서는 ‘過去 500년을 알았고 未來 500년을 알았던 人物’이라는 豫言者的인 人物.著書로 《유백온소병가》, 《성의백문집》, 《적천수》, 《백전기략》

    太宗 33권, 17년(1417 丁酉 / 明 永樂15년) 5월 9일(甲午) 3번째기사 中國에 進獻할 處女로 黃氏와 韓氏 등을 뽑다,

    黃氏는 容貌가 美麗하니, 故 副令黃河信의 딸이고, 韓氏는 嬋娟 하니 故 知淳昌郡事韓永訂의 딸이었다" 韓氏의 오빠 副司正 韓確, 黃氏의 兄夫 錄事金德章, 根隨하는 侍女 각 6인, 火者 각 2인이 따랐다. 길옆에서 보는 자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世宗 9년(1427丁未 / 明 宣德 2년) 5월 1일 進獻할 處女로 揀擇된 韓永訂의 막내딸이 婚需로 準備했던 財物을 나눠주다 處女 韓氏는 韓永訂의 막내딸이다. 맏딸(長女)은 明나라 太宗 皇帝의 宮에 뽑혀 들어갔다가, 皇帝가 죽을때에 따라 죽었으므로,

    昌盛과 尹鳳이 또 막내딸이 얼굴이 아름답다고 아뢰었으므로, 와서 뽑아가게 되었는데, 病이 나게되어 그 오라비 韓確이 藥을 주니, 韓氏가 먹지 않고 말하기를, “누이 하나를 팔아서 富貴가 이미 極盡한데 무엇을 爲하여 藥을 쓰려하오.” 하고,칼로 제 寢具를 찢고 갈마두었던 財物을 모두 親戚들에게 흩어주니, 寢具는 將來 시집갈때를 위하여 準備했던 것이었다.

    - 三學士 後孫들을 連結한 주돈식 전 장관의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
    情操를 잃고 姙娠까지 한 女人이 낳은 子息을 "胡虜子息"이라 했어요 그 옛날 還鄕女와 胡虜子의 기구한 運命이 어디 그때 뿐이었나요?

    仁祖때 丙子胡亂의 수난 사람들은 "환향녀(還鄕女)"라는 이름으로 낙인찍어 손가락질하며 蔑視 했으며 情節을 잃었다는 이유로 男便들로부터 公開的으로 苛酷行爲를 당하였고, 힘없는 나라가 잘못하여 끌려가 몸까지 빼앗기고 돌아온 女性들을 이 땅의 男性 들은 등을 돌리고 容納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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