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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 開國功臣의 後裔 洪吉童傳 田禹治傳
  • 올린이 : 연구원 ( 2020.03.29 17:29 ; From : 220.123.66.141 )
  • 조회 : 513 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나오는 홍길동(洪吉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슬픔,

    홍길동 전
    슈퍼 홍길동 (영화 시리즈)
    쾌도 홍길동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不死의 洪吉童/박재홍♬
    (이주은 작사/김성근 작곡)

    사랑도 귀여움도 없는 몸으로
    비바람 불어 불어 구지였드냐
    곡창을 털어내여 초가삼간에
    군졸은 길동 찾어 곡창을 해매였건만
    초목속에 깔 깔 대며 사라지는 홍길동

    팔도야 강산 위에 여덟 길동은
    남몰래 재물 털어 오막살이에
    현상금 일만량이 부러웠드냐
    불길에 죽었다고 손벽치건만
    연기속에 깔 깔 대며 사라지는 홍길동

    ‘萬姓大同譜’ 함경도 경상절제사 홍상직의 둘째아들 ‘홍길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南陽洪氏 高麗 開國功臣 洪殷悅-洪東周-洪毅-洪灝-洪德升-洪灌-洪至柔-洪源中- 洪斯胤-洪縉-洪奎-洪戎-洪澍-洪徵-洪尙直의 아들 洪逸童 洪吉童 얼자(庶子) 홍길동(洪吉童)은 전라도 장성 출신으로 戶曹參判을 지낸 洪逸童(1412~1464)의 異腹同生이 된다.
    洪逸童은 南陽 洪氏 族譜를 最初로 整理한 사람이다,

    대식가(大食家) 홍일동(洪逸童)>

    조선 7대 세조(世祖) 때 홍일동(洪逸童)은 시와 부(賦)를 잘하였을 뿐 아니라. 술도 잘 마셨다. 취하면 풀피리(草笛)를 만들어 불며, 비분강개(悲憤慷慨)하였다.

    어느 때 세조 앞에서 불교를 반대하자, 왕은 곧 죽이겠다고 하였다. 그래도 그는 조리 있게 말하여 겨우 무사하였다. 일찍이 진관사로 놀러 가 그곳에서 떡 한 그릇, 국수 세 그릇, 밥 세 그릇, 두부, 청포 9그릇을 먹고 내려오다가 산 아래에서 다시 삶은 닭 두 마리, 생선국 세 그릇, 어회(魚膾) 한 그릇, 술 40여 잔을 마셨다.

    그래도 보통 때에는 밥을 먹지 않고 쌀가루와 독한 술을 먹을 뿐이었다”라고 되어 있다.
    1464년(세조 10)에 행상호군(行上護軍)으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홍주에 갔다가 거기서 과음으로 죽었다, 유명한 홍길동(洪吉童)은 그의 동생이라 한다.

    洪吉童은 홍일동(洪逸童, ?~1464)의 庶弟라고 되어 있다. 洪逸童의 딸이 成宗(1469~1494)의 後宮이었다.

    남양홍씨는 高麗時代 危機를 피해 전남 장성, 나주, 전북 고창 등지에 내려와 청착하게 되었다.
    洪吉童(1443년 ~ 1510년)은 洪尙直(남양홍씨)의 庶子로, 어머니는 관기 옥영향(玉英香)이고, 1443년 출생하였으며. 1510년 73(75세)세로 사망하였다.

    연산군일기’ 권39에 따르면 연산 6년(1500) 10월22일자에 짤막한 기사가 나온다.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좌의정 성준(成俊), 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계문(啓聞·신하가 글로 아룀)하기를 “강도 홍길동을 체포했으니 기쁨을 이기지 못하옵겠거니와,

    百姓을 爲해 해(害)를 除去하기로 이보다 큰일이 없사옵니다. 청하옵건대 그 도당을 끝까지 잡도록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연산군일기’에 전하는 홍길동은 국사범을 다루는 의금부로 송치돼 추국(推鞫)을 받았다고 하니 보통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 수석 재판관이던 한치형이 심리를 종결하면서 “강도 홍길동은 옥관자를 붙이고 홍대(紅帶)를 차고 첨지(僉知)를 자칭하고서 백주에 떼를 지어 병기를 소지하고 관부에 출입해 거리낌 없이 멋대로 행동했습니다.

    권농(勸農), 이정(里正), 유향소(留鄕所) 품관(品官) 등이 그 정황을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체포, 고발을 아니했으니 징벌하지 않을수 없습니다”라고 한 데서 사건의 심각성을 엿볼수 있다.
    ‘연산군일기’에는 홍길동의 옥사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중종실록’을 통해 홍길동 무리의 형세를 가늠할수 있다.

    중종 18년(1523)에 역시 군도(群盜)사건을 처리하면서, 붙잡힌 자들을 모두 경옥(京獄)에 수감할 것이냐, 지방 감옥에 분리 수감할 것이냐를 놓고 논의가 분분했다. 결국 “지난 庚申, 辛酉年(洪吉童 事件을 다루던 1500년과 이듬해) 사이 洪吉童의 獄事를 감계(鑑戒·본보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분리 수감으로 정해졌다.

    경옥에 모두 수감할 경우, 그들이 옥중에서 말을 서로 통해 추국하는 데 난점이 있으며 반옥(叛獄·옥중에서 도망하는 것)의 우려도 있다는 게 이유였다.그리고 ‘연산군일기’ 연산 6년 12월28일자를 보면 洪吉童을 도와준 堂上務官인 엄귀손(嚴貴孫·?∼1500)의 處罰을 논의한 대목이 있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洪吉童의 행동거지가 황당한 줄 알면서도 불고지(不告知)했고, 洪吉童에게서 음식물을 받았으며,
    洪吉童을 위해 서울에 家屋을 주선해줬다는 죄를 물어 “嚴貴孫은 곤장 100대를 때려 3000리 밖으로 유배하고 고신(告身·직첩)을 모두 회수해야 겠습니다”라고 했다.

    嚴貴孫은 洪吉童과 동당(同黨)으로 파악돼 南海로 流配地가 결정됐으나, 옥에서 대기하다 그해 12월21일 죽었다.
    이처럼 官人 身分인 嚴貴孫도 홍길동에게 포섭됐다는 것은 그의 지도력이 탁발했음을 증명한다.

    더구나 홍길동이 당상관 의장을 하고 관부에 드나들고, 향촌사회의 유력자들과도 소통한 것은 그가 農民指導者라 가능했을 것이다.

    연산군6년 경신년 연산군6년 신유년 洪吉童에 管한 紀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연산군 6년 경신(1500) 10월 22일(계묘)
    연산군 6년 경신(1500) 10월 28일(기유)
    연산군 6년 경신(1500) 11월 6일(병진)
    연산군 6년 경신(1500) 11월 28일(무인)
    연산군 6년 경신(1500) 12월 29일(기유)
    “강도 홍길동(洪吉同)이 옥정자(玉頂子)와 홍대(紅帶) 차림으로 첨지라 자칭
    중종 8년 계유(1513, 정덕 8)
    중종 18년 계미(1523, 가정 2)
    중종 25년 경인(1530, 가정 9)
    중종 26년 신묘(1531, 가정 10)
    선조 21년 무자(1588, 만력 16)

    燕山君時代 洪吉童의 亂(庚申, 辛酉年)
    栗島國 洪氏集團 居住
    洪吉童의 妻 고을노 아들 딸 3男 2女

    小說속의 洪吉童도 활빈당(活貧黨)의 頭領으로 창고를 열어 백성을 진휼하고, 죄인을 잡아 다스리며, 옥문을 열고 무죄한 사람을 석방하는 영웅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허균은 ‘호민론(豪民論)’이라는 논문도 남겼는데, 여기서 그는 사람을 호민(豪民), 원민(怨民), 항민(恒民)의 세 유형으로 구분했다.

    항민은 최저 의식수준을 가진 우민(愚民)이며, 원민은 나약하고 소시민적인 불평세력, 호민은 시대적 사명감을 자각하고 사회와 국가의 갖가지 모순을 개혁하는 지도자라고 했다.

    그런데 허균은 여기서 우리 역사의 창업주인 왕건이나 이성계를 호민이라 보지 않고, 견훤과 궁예 같은 인물을 호민으로 보는 독특한 역사관을 표출해 홍길동을 자신이 꿈꾼 이상 속의 혁명가로 만들었다.

    洪吉童에 관한 기록은 조선 후기 황윤석(黃胤錫·1729∼1791)이 엮은 ‘증보해동이적(增補海東異蹟)’에도 나오는데,

    여기에서 洪吉童의 海外 脫出이 그려졌다.
    그런데 일본 오키나와의 야에야마 博物館에 所藏된 洪吉童의 妻男 장전대주(長田大主) 家門의 族譜에 洪吉童 이름과 出生年度, 故鄕 등이 紀錄돼 그가 正統(명나라 6대 황제인 영종의 연호) 8년(세종 25년, 1443)에 全羅道 장성군 황룡면 아차실(아곡리)에서 태어났음이 몇 해 전 밝혀졌고 小說 속의 율도국이 日本 오키나와임이 確認되기도 했다.

    그들보다 훨씬 큰 ‘도둑’(사실은 農民指導者지만)이 우리 역사에서 나타나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품고 봉건사회 해체를 촉진했다. 홍길동의 후예인 평서대원수 홍경래(洪景來·1771∼1812),는 19세기 農民戰爭의 序幕을 열면서 半封建의 旗幟를 드높였고, 그 후 全琫準이 農民戰爭을 完結지었다.

    최근 개봉한 映畵 ‘洪吉童의 後裔’에서 교활한 기업사냥꾼을 처단하는 현대판 홍길동을 보면서, 현대판 탐관오리의 비리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한국 사회가 아직도 홍길동 같은 의적이 필요한 봉건제 사회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든다.

    연산군 시대 실존했던 인물 忠淸道 盜賊 洪吉童은 정3품 첨지충추부사 복식을 입었다.
    한편 그는 金泉 黃嶽山에 隱居하고 있던 學祖大師에게서 兵法과 武術을 배웠다. 
    黃嶽山(1,111m) 直指寺 1488년(成宗 19) 學祖大師의 重修가 있었다.

    집을 떠나 羅州牧 管轄 장성현, 갈재(葦嶺)를 中心으로 活動, 광주 무등산, 영암 월출산에 본거지를 정하고 주로 탐관오리와 토호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에게 나눠주는 의적 활빈 활동을 했다.   

    그후 지리산 근처의 경상도 하동군 화계현 보리암자에 지휘부를 두고 관군과 대항했으며 멀리 경상도 진주에까지 세력을 펼쳤다. 

    충청도 전역을 세력권으로 부패한 정부와 관료를 상대로 반봉건 투쟁을 벌이던 홍길동과 추종세력은 1500년(연산군 6년) 강상죄(고위관직을 사칭하여 능욕한 죄)로 마침내 붙잡힌다.  
    洪吉童은 처음에는 忠州一帶에서 활약했다,

    洪吉童은 忠淸道 地域을 中心으로 活動했으며, 공주 유금면 대동리의 무성산에는 그가 쌓았다는 山城이 남아 있다.
    공주 우성면과 정안면에 걸쳐 위치한 무성산 중턱에는 홍길동 굴과 홍길동 산성이 있다.
    또 무성산 주변과 공주 지역 주민들에게 지금도 홍길동의 무용담과 함께 ‘홍길동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걸재 향토사학자는 “한천리, 유구 백교리, 유구 추계리 등 8개 지역에서 채록했던 홍길동 전설이 거의 ‘홍길동과 누이의 산성쌓기와 팥죽 이야기’로 대동소이했지만 우성면 한천리의 전설은 다른점이 있었다”며 “그것은 홍길동 산성에 양반들이 마을 山神祭를 지낸 점”이라고 밝혔다.

    실제인물인 홍길동의 고향은 공주임에 이견(異見)을 달 수 없다”며 “공주에서의 홍길동은 의적이 아닌 영웅이었다.

    또한 ‘증보 해동이적’이라는 책에는 “홍길동이 감옥에서 탈출하여 海外로 달아나 임금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념품 가게에서 栗國 소금을 발견하고 놀랐다. 율도국이 홍길동이 떠나간 섬인데 실제로 존재하다니 놀랍다.

    25번 이상 일본에 유적 답사여행을 다녀 일본에 남아 있는 백제 역사 지우기를 목격한 나에게는 粟國島는 율도국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여진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琉球國을 류추우國이라 발음한다.

    홍길동전에 보면 홍길동이 왕을 만난 후 살 곳을 찾아 중국 남경으로 솟구쳐 날아가는데 그 때 본 諸島 중의 하나가 율국도일 것이다. 나중에 여기서 자리잡아 세력을 키워 본섬으로 들어가 왕이 된다.

    유구국이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편입된 이후의 역사서에는 홍가왕이 유구국 군대에 패해 처형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홍만종의 '해동이적'에 명에 갔던 우리 사신이 유구국왕의 성이 共 아래에 水를 쓴다고 왕에게 보고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洪을 그렇게 쓴 것 같다.

    장년기에 접어들며 홍길동은 세력이 팽창하게 됐고, 이어 관군에 쫓기게 된다.
    오키나와에는 民權運動의 先驅者 洪吉童을 追慕하는 紀念碑가 세워져 있다 이에 따라 그는 활동 근거지를 주로 해상으로 바꾼다.

    이를 계기로 훗날 뱃길로 3천리나 떨어진 일본 오키나와에 율도국이라는 해상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그 곳에서 그는 오키나와 유구라는 소국의 왕위에 올라 통치했다는 의견을 내 놓고 있다. 

    그 근거로 오키나와 섬에 홍길동의 기념비(현지에서는 탄생기념비라고 명기됨)에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또 홍길동이 오키나와에 각가지 우리 문화와 기술을 전해줬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키나와의 줄다리기는 우리나라 것과 유사하다.    이와 함께 최근 구지천성(오키나와 현지의 성곽) 발굴과정에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그리고 조선의 돌(화강암)로 만든 선박용 닻이 발견됐고 해동통보와 함께 국적 미상의 용봉통보(龍鳳通寶)가 발견되기도 했다. 

    오키나와에서 지금도 민족영웅으로 추앙받는 오야케아카하치의 별명이 홍가와라(洪家王)다. 즉 홍길동이라는 얘기다. 그는 군웅할거시대에 두각을 나타내어 당시 오오하마촌을 근거지로 집단생활을 하였으며 민중의 제왕으로 추앙받았다.  

    조선에서 미질이 좋은 신품종의 볍씨(쌀)을 오키나와에 가져갔다.   

    오키나와 일대에는 이미 안남미라는 남방계의 쌀이 있었으나 질이 좋지 않았고 그녀가 가져간 볍씨는 그 곳에서 크게 각광받았다고. 즉 홍길동 집단이 해외로 떠나면서 오곡의 종자를 항아리에 담아 함께 가져갔다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일본의 정경대 교수는 '유구국은 조선계 왜구‘란 제목의 책을 썼다. 왜구가 아니라 삼별초일 것이다. 그는 유구국의 尙씨왕조가 三太極을 徽章으로 쓰는 것, 믿는 신들이나 시집에 조선의 문화가 배어 있다는 것을 증거로 들고 있다.오키나와 기와집의 수막새는 無窮花 紋樣이다.

    날개 달린 아기장수 전설 - 홍업선(洪業善)의 묘-
    홍업선(洪業善)은 약 300년전 제주시 애월읍(涯月邑) 신엄리(新嚴里)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풍모가 예사 사람과 다르고 또한 힘이 세었다.

    집안은 농사를 지었지만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므로 아버지는 항상 짚신을 삼아 이 아들에게 팔아오라고 하여 살림을 보태었다.    

    아들 업선은 꼬박꼬박 성안(제주시)에 가서 짚신을 팔고 왔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아들의 행동에 이상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차차 유심히 보니 너무 빨리 성안을 다녀오는 것이었다.

    하루는 일부러 새 짚신을 신기고 성안에 가서 짚신을 팔아 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아들이 돌아오는 시간을 유심히 가늠해 보았다. 지금 시간이면 성안에 도착할 시간이 되었겠지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아들은 어느새 짚신을 다 팔고 돌아왔다.

    아버지는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며 일부러 모른 체 하고는 아들 몰래 신고 간 짚신을 보았다. 새 짚신에 흙이 한 점도 묻어 있지 않아 있었다. 아버지는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술을 빚어 놓게 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 업선(業善)을 불러 별미인 술이니 마셔 보라고 하였다.    

    어린아이지만 아버지가 시키는 것을 거역할 수 없어 술을 마셨다. 얼마 후 술기가 돌아 아들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가만히 옷을 벗고 몸을 조사해 봤더니 이게 웬일인가? 아들의 겨드랑이에는 좋은 명주가 휘휘 감겨져 있었고 이 명주를 푸니 큰 새의 날개 만큼한 날개가 나와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겁이 났다. 만일 이것을 관에서 알면 역적으로 몰릴 것이요 삼족의 멸망할게 분명하다. 아버지는 얼른 가위를 가져다 날개를 잘라버렸다. 아들은 몹시 고단하다하며 일어났다.

    몸단장을 하려다가 날개가 없어진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모가 한 일이어서 감히 원망소리를 못하였다.  
      
    그 후 업선은 전보다 기운이 없고 발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보통사람에 비하면 힘이 장사여서 누구도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홍업선의 묘는 현재 제주시 외도리(外都里) 위쪽 사만이라는 곳에 있고 매년 묘제를 지내고 있으며 그의 9대 손들이 살아 있다고 한다.

    요즘은 보고도 못믿는 세태지만 한가지 분명한것은
    전국의 높은산 꼭대기 너럭바위마다 장수발자국은 너무나 많다 이것은 무엇으로 설명할것인가? 

    田宗會 靈光田氏始祖 (高麗 開國功臣)
    田漑-田德普-田志廉-成宗朝 田拱之-
    田淑鱗-田寵文-高宗朝 田元均-田甫龜 田甫龍,田甫麟- 毅宗朝 田得時-田成茂-
    杜門洞72賢 潭陽전씨 7世 田祖生 田貴生

    田禹治傳
    南陽田氏始祖 田豊-田柱-田得雨-田興-田稼生-田漬-司直 田禹平 兵曹參判田禹成.
    翰林學士南陽君 田豊은
    중국의 한림학사로서 송과 원의 제왕권재우치기록을 잘못했다 하여 元帝의 미움을 사 海東으로 謫遷되어 우리나라에 定着하게 되었다.
    高麗朝에서 宋나라에 대한 그의 忠節을 가상히 여겨 南陽君에 봉하고 優待하였다. 이로 인하여 後孫들은 그를 始祖로 하고 本貫을 南陽으로 하였다,

    南陽 田漬의 아들 四男 田禹平(1515년 忠順衛 保功將軍).田禹成.田禹先.進士田禹治 조선의 기인(奇人). 본관은 남양. 송도(松都) 출생. 중종 때 서울에서 관리 생활을 하다가 사퇴하고 송도에 은거하며 도술가(道術家)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신광한(申光漢)ㆍ송인수(宋麟壽) 등과 우의(友誼)가 깊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횡행 하면서 의협심으로 貧民救濟(빈민구제)에 나섰으나 終乃(종내)에 이르러서는 왕을 속인 罪(죄)와 惑世誣民罪(흑세무민죄)로 黃海道信川獄(신천옥)에서 獄死(옥사)했다. 태수가 사람을 시켜 파묻게 했는데 뒤에 친척들이 이장(移葬)하려고 무덤을 파보니 시체 없는 빈 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가정연간(嘉靖年間, 1522∼1566)에 역질을 도술로 예방하였다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 길가 언덕 수령 500여년 기념물 제152호 은행나무 田禹治 나무,
    아기장수의 한이 서린 천마의 발자욱과 마제(馬蹄)바위 군락지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바닷가 바위에 선사시대의 화석인 '공룡발자국화석'.힘센 장수가 살았는데, 장수의 발자국이나 손자국, 타던 말발굽 자국이 바위에 남아 있다고 한다. 또 장수가 큰 바위를 옮겼거나 무거운 돌을 던지고 놀았다는 이야기.

    오뉘산성에 나오는 오뉘 힘내기에서 힘센 남동생이 서울에 다녀오는 동안 누이가 쌓던 성터의 바위가 바로 장수.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증산리의 장수바위는 그릇된 장수가 개심하도록 가르치는 구실을 하며,

    농바위 전설은 장군의 출현 시기에 대해 인식 차이를 보인다. 무주읍 오산리, 적상면 괴목리와 사산리의 장도바위는 최영 장군이 바위를 칼로 베어 잘랐다고,

    금산군 복수면 지량리는 영규대사가 창으로 바위를 잘랐다는 창바위전설이.또 어느 장수가 양쪽에 있는 바위를 건너뛰었다는 전설도 있고,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왕산리에는 장사가 치마에 싸서 갖다 놓은 바위가 서너 마지기가 되었다고. 용인시 원삼면 독성리의 장수바위는 장군이 부하들과 도읍지를 정하려는데, 서울이 먼저 정해지자 화가 나서 흔적을 남긴 바위.

    탄부면 장암리의 장수 바위 '장바우'는 마을 뒷산에 '장수 바위'가 있어 '장바우' 바위에 커다란 '장수 발자국' 표시가있으며?..바위에 깊은 구멍이 뚫어져 있다. 덕석바위에는 지금도 소년장수의 발자국 및 말의 발자국 흔적,

    인왕산 맨 꼭대기 단단한 바위에 큰 바위덩이에 움푹움푹 발자국창선면 당항리 금오산(질마산) 장수바위

    춘천 용화산 장수바위.화양리 장수바위 한 장수가 이곳에 산막을 치고 병졸을 지휘하였는데 이 바위에 기를 꽂아 놓고 앉 아서 사방을 경계하면서 한참 정신없이 병졸을 지휘하던 중 현기증이 일어나 바위를 짚었다 한다.

    그 후로 이 바위에는 깃발을 꽂았던 터와 장수가 앉았던 터, 손을 짚었던 터가 있고, 장 수의 발자국과 말의 발자국도 남았다는 전설.

    장수가 있던 바위라 하여 장수바위라고 한다바위는 마당처럼 넓고, 어른 발보다도 휠씬 큰 발자국이 서너 개 찍혀 있다.

    옛날 한 장수가 바위를 성큼성큼 걸어서 지나갔으므로 이처럼 발자국이 남았다고 한다.바위 위에는 돌장수의 발자국이 여러개 찍혀있다,

    *乙巳勒約이 있기 1년전인 1904년 8월 朴周大는 '渚上日月에 義城의 金城山 밑에서 龍머리에 이리 몸을 하고 온몸에 털이 나 있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기록한다.
    夫婦는 이를 해괴히 여겨 땅에 파묻었는데 묻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역시 살아서 먼저 돌아와 있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말을 했다. 아이는 "나를 죽일수 있는 사람이 安東에 있는데 아직 그는 世上에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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