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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곰(熊)의 후손인가? 1920년 日本에서 檀君神話로조작 한것을 아는가
  • 올린이 : 족보학인 ( 2020.01.24 08:54 ; From : 112.166.50.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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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姓氏를 알면 우리나라의 神話를 理解할수있다.

    호랑이(虎)가 곰이(熊) 어떻게 사람이 되고 호랑이나 곰이 사람을 낳을수가 있는가?

    馬氏 象氏 魚氏 龍氏 ,营山牛氏, 袁氏 猪氏 狗氏, 羊氏. 豚氏, 獐氏, 鴌氏 毛氏 鳳氏
    古朝鮮의 官職名 : 猪加(家),狗加(家),牛加(家),馬加(家),羊加(家).
    夫餘의 官職名 : 猪哥(家),·狗哥(家),·牛哥(家),·馬哥(家),·

    『萬姓通譜』“虎見姓苑 八元伯虎之後” 『通志氏族略以名爲氏』“熊氏鬻熊之後 以名爲氏 今望南昌江陵” 『世本』“文王師鬻熊 成王時封其曾孫於楚 子孫以熊爲氏”.

    - 山西虎氏人物史-
    虎臣 虎坤元 虎大威 虎嵩林 虎勇 虎符 虎英 虎威 虎雄 虎振 虎翼 虎盘
    楚나라 國姓이 羋姓 雄氏(吳越:吳越同舟,臥薪嘗膽의 由來)

    熊氏家谱資料, 熊氏宗谱 40卷
    春秋戰國時代 楚나라 王들의 姓氏 熊氏
    王維(699~761) 安陽으로 赴任하는 熊氏를 보내며(王維: 送熊九赴任安陽)

    申氏, 朝鮮犬氏大同譜
    渤海時代: 卯氏 烏氏
    百濟時代: 近肖古王의 曾祖母 : 王后 辰氏
    高句麗: 巳氏
    通志氏族史:酉氏:黄帝十四子之一姓也
    侯氏는 고쳐 亥氏로 하였다.
    潛夫論 4.(31장 - 끝) 禽氏.

    動物 이름 姓氏 ("東國輿地勝覽")
     王建이 高麗를 세울때 목천(충남 천원군 목천면)에 살던 百濟 遺民들이 百濟의 再建을 위해 抗爭을 하자 화가난 태조 왕건이 목천 사람들에게 목천 우(牛-소)씨, 목천 상(象-코끼리)씨, 목천 돈(豚-돼지)씨, 목천 장(獐-노루)씨 등의 동물 성씨를 억지로 붙여 주었으나
    後에 우(禹), 상(尙), 돈(頓), 장(張) 등 같은 음의 다른 글자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檀君朝鮮 時代의 遺物遺蹟과 實證科學的史料인 文獻資料
    遺物遺蹟.
    △ 왕검단군이 단기 51년 부루태자 등을 시켜 강화도에 쌓은 정족산성과 마니산 참성단
    △평양 강동군 대밝산의 구을단군릉 △흘달단군 50년(BC 1733년)에 벌어진 5성취루(五星聚婁)현상의 과학적 입증(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라대일 박사가 천문과학으로 입증)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 정효공주 묘비(환단고기 기록 입증)
    △ 광개토대왕비와 충주시 노은면 불상(장수왕 연호가 건흥이라는 환단고기 기록 입증)
    △ 단군조선의 성터(평양 낙랑성터, 하얼빈 대전자성터, 지가영자성터, 내몽고 적봉성터 등 60여곳)
    △ 단군조선시대 암각화(울산 반구대 암각화, 고령 양전리 암각화, 함안 도항리 암각화 등)
    △ 단군조선시대 고인돌(세계고인돌의 반이 한반도에 몰려있다. 그 중에도 많은 곳은 강화도, 평양 문흥리 등 10개 지역, 경기 파주군 옥석리, 전북 고창, 전남 화순, 대구 대봉동 지역 등)
    △ 단군조선의 청동기문화출토(초기 청동기 유적∼요동지역, 평북 신암리 세죽리 유적, 평양시 금탄리유적, 황해도 봉산군 신흥동 등 7개 유적, 함북과 길림성 50개이상 지역에서 출토) (발달된 비파형청동검∼단기 13세기 요동지방부터 한반도를 거쳐 단기 20세기경에는 일본구주지방까지 전파됨.)
    △ 미송리형토기(단군조선의 대표적 토기, 평북 의주군 미송리동굴서 질그릇과 유골2구등 발굴), 채색토기, 흑색토기, 나무곽무덤, 귀뜰무덤, 벽돌무덤 등 다양한 출토물들 많다.

    史料인 文獻資料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사료적 가치를 지금도 부정하는 사대식민사학자들이 있다면, 우선 다음과 같은 6가지 실증사례에 대한 반증제시해야 한다.
    ① 서울대 박창범교수가 입증한 13세기 흘달단군 50년 천문학적 5성취루 현상
    ② 발해 3대문왕 대흠무가 "대흥"이라는 환단고기 기록이 정효공주묘비에서 입증된 점
    ③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를 세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처음 나오는 바, 이것이 김병호씨의 저서 "고구려를 위하여"와 KBS역사스페셜(2001. 5. 16)에서 입증한 점
    ④ 환단고기 단군세기 왕검단군 51년에 마니산 참성단과 정족산성을 쌓은 바, 지금까지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음
    ⑤ 평양 강동군 대박산에 단군릉이 있는데, 환단고기에 구을단군이 전국 순행 중 붕어하여 평양 대박산에 묻혔다는 기록이 있음
    ⑥ 규원사화나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실증사학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6하원칙에 입각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현재 그런 사람이 없다.

    '단군신화' 조작, 그 처참한 현실
    고조선 건국절이 '개천절'... 한국 고대사 제대로 알자단군이 세운 조선은 『세종실록지리지』와 역사서, 중국의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이를 부정하려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첫 시도는 경술국치 전부터 시작되었다.
    '檀君神話' 登場'
    단군신화'라는 말이 우리나라 잡지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일반인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개벽』 창간호(1920.6.25)에 필명(筆名) '일태(一態)'라는 자가 쓴 논설 「단군신화」이다.
    그 내용은 '단군의 전설'이 곧 '단군신화'라는 의미를 갖게 하고, 민속과 관련된 것으로써 주술성이 가득한 것이어서 배달겨레가 국조(國祖)라고 인식해 오던 단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것이었다.그 후 신문이나 잡지 등에 논설 또는 논문 형태로 '檀君神話'가 대대적으로 소개되었다.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면서 1928년 1월 1일부터 10일까지 『중외일보』에 「단군신전(壇君神典)에 들어있는 역사소(歷史素)」라는 제목으로 5차례 연재를 했다.
    그는 『삼국유사』 속에 나오는 『고기(古記)』는 『단군기(壇君記)』이며, 이것은 '단군신(壇君神)의 이야기'로 신화(神話)임을 강조하여 단군의 건국사화를 '단군 귀신 이야기'로 만들어 버렸다.
    김준은 1935년 12월 『조선중앙일보』에 「단군신화 연구」라는 제목으로 13차례나 연재를 했고, 이듬해 김태준은 『역사과학』에 「단군신화 연구」를 3차에 걸쳐 실었다. 청맹과니들의 행진광복 후 이른바 '단군신화'에 대하여 신문과 잡지 등에 기사화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를 제제로 한 논문과 단행본이 쏟아졌다.그 뿐만 아니라 초·중학교 교과서와 고등학교 국사·국어·문학 교과서에 '단군신화'가 지금까지 실려 있다.
    단군이 우리나라를 세운 후 대한(大韓)(1897~1910)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왕조사(실록)나 문집, 고전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에 '단군신화(檀君神話)'라는 용어가 단 한 번이라도 나온 적이 있었던가?
    전술한 바와 같이 단군신화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 탄생된 것으로 이 용어가 등장한 지 1백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이를 보지 못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청맹과니들인가?
    悽慘한 現實
    조선 세종 때는 『단군고기』라는 사서가 있어서 그 일부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왔기에 당시 일부 유학자들은 단군을 국조로 보았다.
    그러나 그 후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려 있는 『단군고기』를 무시하고 멋대로 고친 후 기자를 성인으로 만들고 추앙하기에 급급하였으니, 윤두수가 『기자지(箕子志)』를 썼고, 이이는 『기자실기(箕子實紀)』를 편찬하여 '기자광풍'의 근원을 제공하였으며, 남인의 영수 허목과 서인·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예송(禮訟)'을 벌여 조선 천지를 기자광풍 속에 빠지게 하고는 마침내 겨레의 뿌리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으니, 반성해야 할 부끄러운 과거사이다. 그런데,

    그 『삼국사』를 일제 식민사학자 누군가 『삼국사기』라고 하니, 앵무새처럼 지금까지 따라 하고 있다. 책표지에 '삼국사(三國史)'라고 적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삼국사기'라고 하니, 이보다 더한 청맹과니가 있을까? 이 얼마나 처참한 대한민국의 현실인가?

    “世宗大王은 檀君祠堂을 세웠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든 성군으로 유명하지만, 平壤에 檀君祠堂을 세웠다. 이어 세조는 歷代 임금 最初로 檀君殿에 參拜했다.

    1425년 정척(鄭陟)은 단군이 기자묘에 배향된 데 문제를 제기했다. 단군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으로 해서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논의 끝에 1429년(세종 11) 평양의 기자묘 남쪽에 단군묘가 건립됐다.]
     
    세조는 단군전 참배에 나섰다.
    1460년 10월 4일 한양을 떠나 파주를 지나 개성을 거쳐 15일 평양에 도착했다. 17일 단군사당에서 친히 제사를 거행했다. 신주를 ‘조선시조단군’이라고 썼다. 김성환 박사(경기도박물관)는 “단군이 국조임을 공인한 것”이라며 “(친제는) 자신의 왕위계승이 고조선 단군과 이를 이은 고구려 동명왕을 계승했음을 승인받고자 한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시대 개막과 더불어 임금의 각별한 신임을 받은 '용헌공 이원'은 고려 공민왕 시절 수문하시중을 지낸 행촌 이암의 4남 이강의 외아들로서, 이원(李原)’은 태종 18년에 우의정에 제수된 후 다시 세종 즉위일에 세자의 선생을 겸하는 까닭에 벼슬을 고쳐 받고, 다음날 종묘에 나아가 조상님들에 대한 새 임금의 즉위신고를 대행한다.

    그의 조부 이암이 편찬했으나 출판하지 않고 깊이 보관하던 역사책‘단군세기’를 세종임금에게 진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원이 바친‘단군세기’를 읽은 세종대왕은 고조선을 개국한 단군을 국조로 인식하고 평양에 단군사당을 건립했다.

    그 덕분으로 2천년 전 고구려 고주몽이나 발해의 대조영처럼 우리도 스스로를 단군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또한 단군세기에 있는 가림토 정음 38자를 보고 훈민정음 창제를 결심하기에 이른다

    세종 7년, 평양에 단군사당 건립
     
    세종실록에 단군세기와 관련된 기록은‘세종 7년(1425년) 9월 25일에 평양에 건립한 단군사당’의 기사이다.

    세종 즉위 당시보다 3,751년 전 조선을 개국한 단군왕검을 국조(國祖)로 인식하고, 단군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이 왕명에 의해 공식적으로 건립된 것은 고구려와 발해의 몰락이후 최초의 일이다.  

    세종대왕은 이암의‘단군세기’를 통해서‘고조선을 우리 민족의 역사’로, 그리고 ‘단군을 국조’로 확신했던 것이다.
     
    소리글자‘가림토 정음’과 훈민정음 창제
     
    세종 즉위년 보다 3,600년 전에 고조선 3세 가륵단군의 어명으로 만들어진 '소리글자' 가림토 정음 38자를 단군세기에서 발견한 세종대왕은‘백성들 누구나 쉽게 익히고 쓸 수 있는 소리글자’를 창제할 결심을 했으리라.

    단군세기에 기록된 가림토 38글자와 대조하면 훈민정음 28글자 중에 24자는 똑같고, ‘ㅎ’과 ‘꼭지 있는 ㅇ’이 같은 글자가 없으며‘ㄷ’과‘ㅌ’두 글자는 글자 형태는 같으나 앉은 모양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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