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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白山 호랑이 義兵將 申乭石
  • 올린이 : 김연구원 ( 2019.09.11 16:48 ; From : 121.159.159.98 )
  • 조회 : 3292 회

  • 太白山 호랑이 義兵將 申乭石 將軍의 詩

    “樓閣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서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가
    가로누운 檀君의 터전을 恨歎하노라
    남아 27歲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문득 가을바람이 부니 感慨만 이는구나!“

    신돌석(申乭石, 본명(本名)은 신태호(申泰浩), 일명은 신돌석(申乭錫), 신태을(申泰乙), 신태홍(申泰洪), 신대호(申大浩)라고도 불린다. 자는 순경(舜卿), 1878년 11월 3일 ~ 1908년 11월 18일)은 구한말의 의병장.

    초기 의병 운동이 주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평민 출신이었던 그는 대한제국 최초의 평민 의병장으로 유명하다. 주로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태백산, 소백산 주변에서 활약하였다. 경상북도 출신. 나라를 위해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격렬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生涯 (申乭石說話)
    신돌석은 寧海郡 南面 福坪里 현 盈德郡 丑山面 釜谷洞의 평범한 농가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계는 평민 출신이었다.
    신돌석은 민중적 영웅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지녔으나, 왜적을 물리치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은 내력이 설화의 주안점이 되고 있다. 구전자료는 다양하며, 출생지인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을 위시한 여러 지역에 전하여지고 있다. 구비 전승되는 자료를 통하여 신돌석의 생애를 기록한 최근의 역사적 문헌에는 미처 정착되지 못하였던 사실의 설화적인 변용을 현지 조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내용신돌석은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난 농사꾼이었지만 고래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천서(天書)를 얻게 되어 비범한 장수로 비약적인 변모를 하게 된다. 신돌석은 힘이 세어서 놋화로를 우그러뜨리고 바위를 공깃돌처럼 받았다 한다. 뜀뛰기를 잘하여 큰 나무나 고을의 객사를 뛰어넘기도 하였으므로 날아다닌다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평소에도 못마땅한 일이 있으면 그대로 두지 않아, 부랑자나 도둑을 굴복시키고, 미친개를 잡아 던지고, 호랑이도 퇴치하였다 한다. 이러한 삽화는 모두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장수의 모습인데, 그것이 신돌석에게서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왜군과의 싸움을 두고서도 다채로운 이야기가 있다.신돌석은 형세가 불리하여 죽을 고비가 몇 번이나 있었어도 번개같이 탈출하였다 하고, 어느 날은 손에 탄환을 맞았어도 물러서지 않고 적을 넘어뜨렸다고 하였다. 피를 흘리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총을 쏘아도 죽지 않는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왜군은 신돌석을 잡아오면 상을 주겠다는 술책을 써서, 결국 신돌석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가 특히 자세하게 전해지고 있다.신돌석이 이종사촌이라고도 하고 외사촌이라고도 하는 친척 집에 들러 잠시 몸을 쉬려는데, 그 사람이 나쁜 마음을 품고 독주를 먹여 잠들게 하고서 신돌석의 목을 쳐서 왜군에게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나 왜군은 신돌석을 산 채로 잡아야 상을 준다 하였고, 배신자는 배신의 대가도 받지 못하였다 한다.의의와 평가신돌석의 생애는 좌절당한 민중적 영웅인 김덕령(金德齡)의 생애와도 비교된다. 신돌석의 비참한 좌절은 역적이 되어 집안을 망친다고 생각한 부모나 친척에게 태어나자마자 피살되었다는 「아기장수 이야기」, 또는 산에 불을 질러서 장수가 태어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복합되어 그 비극적인 의미가 더 깊어지기도 한다. 구비 전승이 항일 투쟁의 전설적 영웅과 결부된 좋은 예이다.

    義兵 活動
    을미사변이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날 때 18세의 나이에 영덕에서 처음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경상북도 동해안 지방을 차례로 점령하는 큰 전과를 올렸고, 이에 경북 출신으로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김하락 부대에 안동의 유시연과 함께 합세하였다. 그러나 김하락의 의병 연합 부대가 영덕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여 김하락이 중상을 입고 투신 자살하면서 그의 의병대도 해산되었다.

    신돌석은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 이후 동생 신우경과 함께 재차 의병을 일으켰다. 울진군에서 일본 선박을 여러척 격침시키고 강원도 동해안 일대, 경상북도 내륙 지방, 원주 등 강원 내륙 지방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이때부터 그는 '태백산 호랑이'로 불릴 만큼 신출귀몰한 전공으로 이름을 날렸고 여러 구전 전설들도 만들어졌다.

    이강년의 의병대와 순흥(영주시)을 공격하는 연합 작전을 시도하는 등 계속되는 전과를 올리면서 경북 일대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부상하여, 이인영의 연합 의병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었을 때도 영남 지방을 담당하는 교남창의대장에 선임되는 등 양반 출신의 유학자 의병대장들도 그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할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사망
    1908년부터는 유시연의 부대와 연계하면서 주로 유격전 위주로 의병 항쟁을 펼치다가, 그해 겨울 영덕의 눌곡(訥谷)에서 암살되었다.(신돌석이 동료의 배신으로 사망했다는 의견도 있다.)

    피살 과정
    그를 살해한 사람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살해범이 김상렬(金相列) 삼형제라는 것이다.[1] 신돌석의 부하였으며 외사촌 또는 이종사촌들로 가까운 친척이었던 김상렬이 형제인 김상태(金相泰), 김상호(金相浩)와 함께 신돌석에게 걸려 있던 거액의 현상금을 노리고 그에게 독이 든 술을 먹인 뒤 도끼로 살해하였다는 설이다.

    신돌석의 시체를 일본군에 바쳐 많은 상금을 타려는 속셈으로[2] 이들은 독주를 만들어 신돌석 앞에 내놓았다. 그는 이 독이 든 술을 들이키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2] 김상렬 형제는 도끼로 신돌석을 내리쳤다.

    살해범의 이름이 김도윤, 김도룡(또는 김도용) 형제라는 설[3], 범인은 김자성이고 그가 신돌석의 고종 사촌이었다는 설[4] 도 있다.
    한편, 국가보훈처의 포상자 공적조서에 따르면, 신돌석의 고종형제 김자성(金自聖)이 자기집으로 유인하여 삼형제가 도끼로 쳐죽였다고 하며 신돌석의 유해를 들어옮기고 일본 헌병대에 발고하였으나 생포하지 않고 살해 후 발고하였다는 까닭으로 일본 헌병대로부터 퇴짜를 맞고 현상금을 받는 데 실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95년 경북 영덕에 있는, 그의 생가인 초가집이 복원되었다.

    가족 관계
    부친 : 신석주(申錫柱) 평산신씨
    모친 : 분성김씨
    누나 : 신씨
    매형 : 박수찬
    부인 : 한재여(청주한씨, 1878~1952)
    아들 : 신만이(?~1908)
    양자(조카) : 신병욱(1927~ )
    동생 : 신우경(申友慶, 일명 신도환(申道環))
    동생 : 신태범(申泰範, 1888~1962)
    손윗처남 : 한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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