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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김씨 충의공파와 경주김씨 백촌공파
  • 올린이 : 정글북 ( 2016.09.13 20:32 ; From : 175.200.7.15 )
  • 조회 : 4493 회
  • 1684년 김해[김녕김씨] 강희갑자보 서문
    경순왕[敬順王]
    은열[殷說 ;工部侍郞]
    렴 [濂 ;奉御]
    1世 품언[稟言 ;官至少保封隋城君其後爲水原金氏]
    2世 순보[順譜 ;中書令玉寶先生諡文正公]
    3世 세익[世翊 ;左承宣]
    4世 봉기[鳳麒 ;同正]
    5세 시흥[時興 ;高麗明宗朝封上洛君始籍金州卽金海也 其後金海金氏 高麗明宗朝以上落君封金州 始籍金州卽金海也

    康熙甲子譜跋[1684년]
    各有分封文章道德代演出而其麗不億王第四子大安君之孫少保公事麗顯宗乃以契丹討勳因封隋城而其後爲貫水原歷四傳而有上
    洛君仕於麗明宗朝而討平位寵之叛初封上洛又平匡等之亂追封金寧卽金海也,子孫繁昌因封爲籍則金寧君實爲我移貫之肇祖而駕洛之姓金寧之族自是

    김녕김씨 영사공파[휘 ;준]종가 족보 1684년 강희 갑자보 서문 입니다
    김해[현;김녕]김씨는 경주김씨에서 분관 한것이 아니라 수원김씨 에서 분관 하였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김염 분을 김해김씨 관조라 하나 전혀 근거가 없다
    조선조 중후에 김염 분을 김해김씨 시조라 칭하는 가문이 하나 둘 생겨 났는데
    어디에도 그런한 기록이 없으며 김해[김녕]김씨 강희 갑자보 서문을 보면 정답일듯 그렇게 기록될수가 없다
    1624년에 편찬된 김해[김녕]김씨 종가인 영사공파[휘;준]가문 족보인
    천계 갑자보에는 金海伯으로 기록 되어 있으며 김염 분이 김해김씨 관조라는 기록은 없습니다 金寧金氏 貫祖님은 時興 선조님 입니다

    1.김녕김씨 충의공파~문기~현석.인석.원석.의석.정석.
    2.경주김씨 백촌공파~문기~현석~계훈.계준.계지
    3.김해김씨 백촌공파~문기~흠 ~후손 일부는 충의공파 후손과 상당수 상의

    백촌 선조님의 신원및 복관을 누가 격고송원 하였는가 ?
    충의공파 8세손 金爾輝가 1717년 격고를 하고 후에 10세손 金鼎九가 재차 격고를
    해서 백촌 문기 선조님께서 복관작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복관작 교지[復貫爵 敎旨] 시호교지[諡號敎旨] 증직교지[贈職敎旨]를
    나라에서 우리가문 후손들에게 내리시어 현제까지 후손들이 모시고 있습니다
    백촌 선조님 께서 복관작 되시니 여기저기서 후손을 자처하는 자들이 나타나 마침내 소송으로 이어졌습니다 김계훈 후손들이 백촌의 종손이라 잠칭하며 끝없이 소송을
    반복 하였습니다 패소하면 다시 소송하고 가짜후손 들이 소송을 일삼으니
    보다못한 왕께서 1799년[기미]8월21일 복관작 교지 있는곳에 시호교지도 함께
    모시라는 전교를 내리시어 백촌의 종손인 우리[충의공파]가문에 모셨습니다
    후에 전라도[현;충청도]금산에 근본도 없는 김가 성을 가진 김성언이라는 자가
    김담 이라는 자의 양손자가 되어 다시 소송을 일삼다가 죽고없는 사람을 상대로 소송하여[계사년] 일시 승소하여 그 판결문을 가지고 우리가문의 선조 유허비 사당 선조의 묘비 등을 부숴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다가 그자의 비행이 탄로나 귀양가서 죽었습니다 천지도 모르고 그 기록이 사실이라고 지금도 인터넷에 버젓이 자랑을 하는데[일성록] 진실을 알면서도 숨기며 지금까지 후손이라 잠칭하는 자 들입니다[백촌공파] 방원공주의 외척이라 노비로 갈 이유가 없다고 잠칭 하다가
    세조조에 금고에서 풀렸다 하다가 중종29년에 금고에서 해제 되었다 하고 다시
    명종조에 금고에서 풀려서 벼슬을 할수가 있었다 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한 기록 없습니다 다 거짓말 입니다 하다 하다 않되니 왕명에 항거했다 합니다 왕명에 항거하다 몇이나 살아 남았는지 알기나 하는지 조선조에 먼저 벼슬하고 후에 금고해제[거짓말]라 과연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입증도 못하면서 자랑을 하는데 사실 이라면 대단한 가문 이겠지요 기네스복에 오를 기록 입니다


    1.충의공파
    1731년[신해] 영조때 왕명으로 김문기의 관작을 회복 시킨후 1778년[무술]
    정조때 김문기에게 시호교지를 내려 충의공[忠毅公]의 시호를 추증[追贈]하 는 등 조정에서 김문기를 순절한 충신[忠臣]으로 예우하고 그 종손에게 적몰
    [籍沒]된 옛 재산을 환급해 주고 그 후 내외손으로 인정되면 정속[定屬]에서 풀리 고 군역[軍役] 기타의 천역[賤役]을 면제 시켜 주었다
    이러한 사실이 명백한데 정속 군역 천역을 받은적도 없는 자들이 300여년을 모질게 숨어 살았다고 하니 경주 복관 판하문은 거짓이 맞고
    앞쪽에 보면 성언후손 김모씨가 올려놓은 성언의 기록 유심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김치욱 가짜족보 사건 등등과 호계서원 유생 32명이 상소 하였느니 하는
    글이 있을겁니다 우리 가문은 백촌의 전답을 무상으로 나라에서 돌려 받았는데
    정당한 후손이라 자처하던 성언이는 돈을주고 구입하여 종통소송 배경으로 삼으려 그땅을 호계서원에 기증하니 후에 호계서원 유생들이 감사의 뜻으로 상소 하였는데 그 진실을 알면 저리 글을 올리지 못하겠지요


    2.경주김씨 백촌공파
    백촌 선조님의 후손이라 잠칭하는 자들은 대대로 벼슬을 하였다
    현석 선조님의 아들이라 자처하는 계훈 통덕랑~자용 성균생원~희년 옥천군수.청풍군수~양봉 통덕랑.성균관 진사~정일 통덕랑~한성 장임랑~
    역적의 후손인데 대대로 어찌 벼슬을 하였으며 양반과 혼인이 가능 한지 ?
    백촌 선조님의 손자라 잠칭하는 자의 처조부가 신석조인데
    신석조라는 사람이 병자사화 당시 관계된 분들의 친인척까지 연좌처벌 하여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는데 아무런 처벌도 않받고 벼슬을 했다니
    왕조실록 세조2년 7월 기축조, 기묘조,김계훈 이란 자가 백촌의 손자 였다면 김계훈의 처조부가 과연 그런말을 했을까 ? 입 다물고 조용히 있었겠지요

    3.김해김씨 백촌공파 ;자세한 자료 아직 습득하지 못하였음
    인터넷 어디에 후손분의 글 확인,추후 대조하면 확인 가능하리라 판단됨

    백촌 김문기 선조님은 한번도 본관을 경주로 사용 한적이 없음
    입증도 못할 자들은 백촌의 본관이 경주라 하나 위에 강희 갑자보 서문을 보면 확인가능 하다고 판단 됩니다 백촌의 본관이 경주라 우기다가 김해라는 증거가 나오
    자 족보에다 당대 본관을 김해로 사용 하였다 라고 적었다
    현석 선조님의 아들이라 자처하던 가문의 선조 김계훈 묘 상석에다 김녕김공이라 각자 하였다[당시에는 본관이 김해인데]그런데도 경주라 우겼음
    1846년도에 경주로 본관을 바꿈 왜 바꾸었는지 ?
    1844년 충청도 순찰사 강시영공의 판결로 더 이상 김해김씨 백촌공파라 행세를 못하니 경주로 바꾸었다
    증거;국사 편찬 위원회 소장 갑진년 영동관 등급
    경북 대학교 도서관 소장;노능지 병 종통문헌 중 갑진년 충청도 순찰사
    강시영공의 회제[판결문]
    그 후손들이 혹 일성록을 들먹일수 있으나 죽고 없는 사람을 인위적으로 가짜를 내세워 승소한 판결문 으로 그 자는 후에 귀양 가서 죽었다

    김문기 1399년생~김현석 1420년생~김계훈 1424년생 이 계대가 과연 가능한
    계대인지,,,,후손이라 자처하는 가문의 계대 입니다,,
    1995년보 에는 삭제 되었는데 김계훈 세종갑진생 1424년생 삭제 한다고 모르겠는
    가 1456년 당시 32살 나이에 어머님을 따라 외가에서 성장 하다가 안의로 갔다
    그리 자랑 하더니 맞겠지요 통덕랑 벼슬은 언제하나 32살 나이에 외가에서 성장하고 있었는데 경주김가 백촌공파 족보 권지일 14페이지 2째칸

    판단은 본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맡긴다

    金禧年字景老淸風人[김희년;백촌의 고손자 라고 후손들이 잠칭함]
    증거;국립 도서관 소장;대동야승 을사 전문록,김희년전; 참조
    ;연여 실기술 357쪽~549쪽 金禧年字景老淸風人
    백촌 선조님의 고손자 라 주장하는 김희년 이라는 사람은 청풍김가 입니다
    백촌 선조님은 본관 김해 손자라 주장하는 김계훈은 경주김가 고손자라 주장하는
    이는 청풍김가 후에 김해김가 다시 경주김가
    대단한 가문 입니다 우리 가문은 꿈도 꿀수가 없는 일인데
    조선조에 입맛에 따라 본관을 마음대로 바꿀수 있다니 대단한 가문 입니다

    帳籍[호적]에 김계훈이 玄錫公 까지 연결이 않된다[호적에 현석 선조님이 없다]
    증거;국사 편찬 위원회 소장;갑진년 영동관 등급

    경주김가 백촌공파 ****블러그에 백촌공파 연혁 이라 자랑을 하는데
    금고형을 당한자가 없는데 금고형을 당해 자손3대가 몇백여년을 모질게 숨어 지냈다 대대로 벼슬아치 잘도 하여왔는데 왜 거짓말을 사실인냥 자랑 하는지
    역적의 후손이 대대로 벼슬아치를 어찌 할수가 있는지 그리고 양반과 혼인이 가능한지요 제 조상이 벼슬아치 할때는 몰랐지만 그 기록 그대로 남는다
    백촌 선조님의 후손들은 당시 절대로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그 기록 자랑 스럽게 적어 놓았는데 지금 감당이 않되니 숨길수 밖에 숨긴다고,,,,,
    들통 났는데 경주김가 백촌공파 연혁은 한마디로 거짓말 이다 [입증 가능함]
    김해김씨 행세하며,,,모질게 몇백여년을 숨죽여 살아 왔다고[이 또한 거짓말]
    입증 가능 합니다,,,,백촌 선조님이 복관 되시니 후손행세 시작 했다

    혹 안동권씨 족보를 들먹일 수도 있다
    안동권씨 족보 성화보[1476년]편찬 당시 계훈은 52살이다
    왜 성화보에는 없고 계훈이 죽은지 250년이 지난뒤 안동권씨 족보에 올랐나
    미스터리한 일이다 1700년 중반에 안동권씨 족보 편찬자가 어찌 계훈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기재 하였을까 그 의문의 답은 ?
    안동권씨 족보 편찬자분께 입보 부탁하여 입보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백촌 선조님 께서 복관 되시니 기다렸다는 듯이 안동권씨 족보에 김계훈의 이름이 어찌 오르는가 아니면 안동권씨 족보 편찬자 분께서 250년이상 바뀌지 않았던가
    현석 선조님의 탄생 연대도 모르니 아들 이란는 자가 1424년생 일수밖에

    이러한 사실을 후손이라 자처하는 자는 알고도 답을 못한다
    1456년 단종사화 당시 아들이란 자의 나이가 32살 이라니 기막힐 일이 아닌가

    그 유명한 경주복관 판하문 이라 그 후손들은 자랑하나 그 진실을 알면 그리 자랑을 못할터 인데 가르쳐주지 않으니 그리믿고 사실이라 믿어 왔을터
    1844년 충청도 순찰사 강시영공의 판결로 더이상 후손행세를 못하니 경주로 바꾸어 놓고 머가 유명 하다고 자랑 하는지,,백촌은 경주김가 인데 후손들이 잘못알고
    김해라 하였다고 백촌공파라는 선조 김인항이가 임금 행차에 징을 치지 않았던가
    백촌 선조님이 어찌 경주김가 일수가 있는가 위 서문을 본적도 없으니 경주라 우기지 경주김가 백촌공파 1995년보 6페이지 2째칸 부터~은열~염;김해김씨관시조~품언 수원김씨 관시조~순보~세익~봉기~시흥 ?~언제 경주로 본관을 바꾸었는가 ? 당대 본관을 김해로 사용 했다는 가문이 왜 時興 관조님을 관조라 기록 못하는가 관조라 쓸수가 있겠는가 김해김씨 행세만 하였는데

    김성언이 고손자 라는 이가 오만데 글을 써서 일성록을 보면 가짜와 진짜를 알수 있다고 자랑을 하고 있는데 ,,,과연 사실일까요
    癸巳年[1833년]예조에서 사망한 김치욱을 상대로 쟁사[소송]를 제기하고
    가짜 김치욱을 내세워 대질케 하는 사위의 방법으로 일시 승소하여 백촌 선조님의
    사당과 유허비와 김관백촌의 父 묘의 묘비등을 무단이 철거하고 부숴 버렸다
    이에 김치수공이 격쟁을 하여 마침내 김성언이의 비행이 탄로나 성언이는 정배[귀향]를 당해서 배소지[귀향지]에서 죽었다
    그런데도 고손자 라는 자는 누구의 묘소를 다듬다가 열사병 으로 죽었다고 자랑한다 제 조상이 어찌 죽은줄 잘 알면서도 왜 거짓말 까지 해가면서 거짓으로 자랑을 하는지 글쓴이가 더 잘알고 있을터 인데 그래도 왜곡을 할려나

    백촌 선조님의 고향은 영동[현;옥천 이원면 백지리]이다
    손자라는 김계훈의 고향은 경남 안의 족보마다 계훈 고향 안의로 갔다
    라고 적다가 백촌 선조님의 고향이 스므내[이십천리]라는 증거를 밀자 옥천 이원 백지리에서 거창 모동으로 이거했다 라고 거짓말을 하고있다
    그런데 경남 안음에 백촌 선조님의 호적이 있다니 그리고 그 후손이라 자처하는 자의 호적에도 연결이 된다니 사실 이라면 공개하면 된다 과연 존재 하기나 하는지 아마도 내놓지 못할 것이다 성언이 고손자 라는자가 그런 글을 썼으니 답을 하겠지만 아마도 필자 생전에는 못 볼것이다
    백촌 선조님의 본적이 영동[현;옥천]이십천리 인데 어찌 안음에서 호적이 나오겠는가 세월따라 고향도 변하는가 ?
    1456년 당시 母 37살 아들 계훈 32살 나이에 어머님을 따라 외가에서 성장 하다가
    고향 안음으로 갔다 손바닦으로 하늘을 가려라

    계파문제의 소송에 관하여 충청도 순찰사 는 1844년[갑진] 10월18일 자 회제로서 계파에 대해서 는 일찌기 갑신년에 도사의 계로서 김치수는 家乘[가계 족보과
    관청에 비치된 장적[호적]이 명백히 일치하고 차이가 없음에 반해 김진황의 부
    성언은 소목[계보]이 연속되지 않고 ,,,

    경주김가 백촌공파 1995년보 13페이지 6째칸
    김알지 후손으로 당대는 본관을 김해로 사용 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그 후손들이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구별하기 위하여 헌종13년 병오에 격쟁하여
    헌종왕으로 부터 후김해김씨의 후예는 전부 경주로 복관 하라는 윤허를 받고
    경주로 관향을 하고 있으나 아직도 김해 또는 김녕으로 사용하는 문중도 있다
    라고 써 놓았다 [위 서문참조]

    김해[김녕]김씨 종갓집도 모르니 저런 글을 쓰지 더이상 김해김씨 백촌공파라 행세를 못하니 본관을 경주로 바꾸어 놓고[1844년 영동관 등급]
    김해[김녕]김씨가 몇 파 인줄을 알기나 하나 32~34분파가 있다
    김녕김씨 종가집[위 서문참조] 충의공파는 김녕김씨 한 분파에 불과하다
    그런데 김해 김녕 후손들 전부 경주로 복관을 해 정신이 나가지 않았다면 저러한
    글을 어찌 쓰는가 백촌의 정당한 후손이라 자처하던 백촌공파만 경주로 바꾸었나
    나머지 34파는 그대로 본관을 김녕으로 쓰는데
    경주 복관 판하문 이라 자랑을 하지만 더 이상 김해김씨 백촌공파라 행세를 못하니 경주로 본관을 바꾸었다[충청도 순찰사 강시영공의 판결문 1844년]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충의공파 후손 이외에는 거의 모른다
    백촌공파 에서 자랑할리 만무하고 숨겨도 시원찮을 판인데[1884년 판결문 공개한적 없음] 1833년 일성록 가지고 오만데 자랑 하던데

    경주김가 백촌공파 잡보를 불사르고 갖고있는 자도 처벌하라는 판결문[**문중 소장]을 재판에 참석한 이는 잘 알터인데[실제 승소 하는데 ; 결정적 이였음]
    그 후손들은 어떠한 생각이 드는지

    백촌공파 족보 권지일 13페이지 6째칸[거짓말]
    백촌공 종통 시비로 수십년간 소송이 진행 결정적인 판결을 보지 못한체 계속 중임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나 왕조실록과 안동권씨 족보 영산신씨 족보에 백촌공의 종손은 경주로 명기 되어 있음으로 판결과 관계없이 경주김씨 백촌공파가 종통임
    으로 기록되어 있다,,,1424년생인 계훈의 본관이 경주라 하였고 그손자는 청풍김가 였는데 언제 김해[김녕]으로 본관을 썼나 거짓말이 아닌가
    계훈의 본관을 경주라고 자랑을 해놓고 정작 김계훈의 묘 상석에 왜 김녕김공으로
    각자 하였는가 계훈이 언제 김녕 이라는 글자는 들어보고 죽었는가
    당대 본관을 김해로 사용해 가증 스럽다 거짓말을 할려면 그렇듯 하게 하여야지
    제 가문 족보도 볼줄 모르나 근본도 없는 김가로 살다가 백촌 후손을 잠칭하면 다 후손이 되는가,,,,
    金寧金氏 忠毅公派 後孫들이 언제 本貫을 金寧으로 바꾸었는지 알기나 아나
    아직도 김해 김녕으로 사용하는 가문이 있다,,, 정신이 나가지 않았다면
    제 족보에다 저러한글 어찌쓰나

    분파를 하면 종가 족보에 분파 기록이 남는다
    언제 누구를 파조로 하여 분파 하였다고
    왜 백촌공파란 기록을 찾을수 없는지 ?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기록은 처음부터 없었다 조선조 중엽 백촌 후손을 사칭하며 하나둘 생겨나서
    세월이 지나니 마치 정당한 후손인냥 잠칭을 하는데 후손을 사칭 한다고 다 후손이 되는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충립이후 사이비 날조손이 나타나 후손행세 한다고 하였는가
    귀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우리가문의 종손 논학공 호적을 보면 금방 알것인데
    호적에 머라 기록되어 있던가 본적이 영동 이십천리 라 기록되어 있을터 인데
    귀 가문 어느누가 이십천리[스므네]에 본적을 두고있나
    계훈 고향 안의[지금의 함양 안의]로 갔다 계훈의 고향은 안의 인데 또 삭제 하셨지요 조금 불리하면 삭제 한다고 모르나 본 구절을 보면 아마도 기절초풍 하겠지요 戶曹判書 金順墓在縣西十九里鋤峴地世宗朝名人也金觀墓在縣南十六里二十川之地是金順之也觀之子文起亦以顯官魯山時與成三問等六臣同日殉節而其子孫未免沒爲良人居二十川里 ,,,본 구절을 보고 머라고 답할지 기대 됩니다,,,
    구 영동읍지에 기록됨

    충북 영동에 있는 호판공 영상공 묘소를 충의공파가 빼앗아 갔다
    라고 하였는데 성언이 후손들은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가
    김녕김씨 충의공파 77譜를 보고서 호판공 영상공 묘소 위치를 알았다
    실제로 모 신문에 기사가 났습니다
    호판공 영상공의 묘소는 현제까지 김녕김씨 충의공파와 대사성공파 종증 후손들이 관리하여 왔으며 양 종증 후손들이 명의신탁 하여 관리하고 있다

    백촌 김문기 本貫은 金海[金寧] 한번도 본관을 바꾼적이 없다

    ***김녕김씨 충의공파 백촌 김문기 선조님의 18세손 정글북***

    판단은 본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몫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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