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말씀 | 연 혁 | 업무소개 | 오시는길
  성씨검색 | 본관별검색 | 기타자료검색
  족보의 정의 | 족보의 종류 | 옛 분묘제도 | 성씨와 본관 | 연호대조표 | 관청및 벼슬이름 |
  예절 상식 | 관례 | 혼례 | 상례 | 제례
  질의답변 | 도서관 뉴스 | 생활상식 | 편찬된족보
慶州金氏 白村公派 12代 嫡孫 金成彦 擊爭錄
  • 올린이 : 김현기 ( 2011.12.07 03:09 ; From : 180.228.134.23 )
  • 조회 : 6628 회
  • 영동(永同)에 사는 김 성언(金成彦) 쟁사(錚辭)
    (국립중앙도서관 古 -6025-5호로 소장되어있음)

    아뢰옵니다. 저희들은 저의 선조(先祖)께서 여러 대(代)에 걸 처 무욕(誣辱)을 당하였기 때문에 종통(宗統)이 아닌 무리들 에게 도탈(圖奪=도적질)을 당하여 4번이나 옳고 그름을 밝혀 달라고 하였으나 아뢰었으나 아직 까지도 일에 대한 판결을 받는 은혜를 입지 못하였어도 지금까지 참고 견디며 죽지 아니 한 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절의를 지킨 의로운 줄기는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이치와 도깨비처럼 나쁜 행적은 숨기기 어려움이 있어 탄로가 날 기회가 있기 때문에 이에 감히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임금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저는 단종 때의 충신인 이조판서(吏曹判書)요 충의 공(忠毅公)이라 시호된 김문기(金文起)의 12대손입니다 병자년(서기 1456년 세조2년) 사화에서 충의공(忠毅公)은 사육신과 더불어 절개를 지키시다 죽음을 당하셨고 그분의 아들 현석(玄錫)도 따라서 함께 돌아 가셨으며 손자는 계훈(繼勳)이요 증손은 자용(自鎔)이요 현손은 희년(禧年). 덕년(德年)이요 5대손은 의봉(儀鳳)이고, 6대손은 정윤(定胤)이고, 7대손은 한용(翰龍)이고 8대손은 휘만(輝萬)이고 9대손은 여경(餘慶)이고 10대손은 담(潭)이고 11대손은 종석(宗碩)인데 종석(宗碩)은 곧 저희 아버지입니다. 충의공(忠毅公) 아래 3대는 임진왜란 이전이고 자용(自鎔)으로 부터는 광해군13년 (서기1621 신유 년)에 만들어진 안음현(安陰縣)의 호구(戶口) 장적(帳籍)에 올라 있으니 곧 저의 6대조 할아버지 정윤(定胤)의 증조할아버지 충의공 김문기(忠毅公 金文起)의 증손입니다 신유 년 호구(戶口) 장적(帳籍)부터 그 이후로 저희 아버지 종석(宗碩)에 이르기 까지 대대로 호적에 실려 있는바 참혹한 화(禍)를 당한 후손이 겨우 한줄기 혈통을 외떨어지고 적막한 시골에서 보전 해 온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경상도 지례에 사는 김치욱(金致旭)의 무리가 그들의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우리 집이 있는 둥 마는 둥 한 기회를 엿보고 정역(丁役)을 면(免)해 보고자하여 오랫동안 살던 영동(永同)을 버리고 훌쩍 지례(知禮=金陵)에 옮겨 살면서 상민(常民)의 종적(縱笛)을 바꾸어 명현(名賢)의 후예라 꾸며대고 사사로이 스스로 족보를 만들고 몰려와 번거롭게 호소하여 온지 오래입니다. 비록 혹간 그것이 그럴까 의심하여 풍문이려니 하였으나 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잇대어 일찍 돌아가시고 저도 어리석고 미련한 아들로 품팔이와 유리걸식(流離乞食)하며 떠돌아다니니 남들 보기에는 후손이 끊어져 없는 것처럼 되자 저들 치욱(致旭)의 무리가 비로소 감히 멋대로 흉험(凶險)한 행위를 맘대로 하게 되었으나 제가 즉시 사실을 밝히지 못한 것은 신세가 가난에 찌들어 비옷을 걸치고 오랫동안 아내와 집이 없는데다가 조상의 문적(文蹟)은 참화(慘禍)를 입은 나머지 남은 것이 없고 종파(宗派)의 정통(正統)을 이은 몸은 스스로 저뿐이라 믿었으며 또한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 한 번에 그들이 몰래 만든 근거가 없는 계략을 사실인 듯 꾸며 놓았으니 그 사실을 깨쳐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이었습니다. 하물며 저들은 거짓 족보를 만들면서 뇌물을 고을에 물처럼 뿌리고 부탁하여 정역(丁役=노역,군역)을 면제한 사람이 열(十)에서 백(百)으로 무리를 이룬바 병자년(서기1816년) 이후 17년간 길바닥에 유리걸식 하면서도 하늘에 호소하며 뜻을 그만두지 못한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 하옵건데 임금님의 어질고 밝으심이 계시어 간사한 무리가 용납되거나 원통한 사람이 그 원통함을 씻지 못함이 없겠사오나 혹시 두려운 것은 일을 맡은 관청의 신하에게 쟁사(爭事)가 많이 쌓인 가운데 오랜 연한(年限)을 끌면서 복잡하게 얽혀진 사연을 자세히 검토하지
    않으려 하지 않을까 염려되는 때문에 치욱(致旭)의 무리가 처음부터 간사히 꾸민 것 중(中)에 모순이 되는 조목(條目)들을 정리(正理)하고 요약하여 외람되게 진술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바라오건데 임금님의 어지심으로 특별히 밝히어 살펴 주시 옵소서, 이른바 김태형(金泰亨)은 김치욱(金致旭)의 아버지입니다. 지난 경술년에 군역(軍役)을 면제 받으려고 적몰(籍沒)된 땅을 돌려 달라고 빙자(憑藉)한 쟁사(爭事)에 말하기를 충의공(忠毅公)의 자손은 영동현(永同縣)에 정속(定屬)되여 이역(吏役)을 지게 되었고 토지와 노비는 그대로 훈신윤성(勳臣尹性)을 가진 집에 내려 졌습니다. 라고 하였으나. 그러나 그 아들 치욱(致旭)의 쟁사에는 말하기를 충의공(忠毅公)의 자손은 상주(尙州)에 정속(定屬) 되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정속된 고을이 그 아비는 영동(永同)이라 하고, 그 아들 치욱(致旭)은 상주(尙州)라고 하였으며 이미 이역(吏役)으로 정속 되었다고 하였으나, 장적(帳籍)에는 사원노비(寺院奴婢)라고 실려 있는 것이 간사하게 위조된 모순된 점입니다. 당초에 적몰된 전민(田民)은 훈신(勳臣) 홍윤성에게 내려젔고 다시 사위인 윤춘년(尹春年)의 집에 주었는데 애비 김태형(金泰亨)은 훈신윤성(勳臣尹性)에게 내려 졌다고 그것을 말함은 몰수된 사실의 시말(始末=처음과 끝)을 알지 못하는 곳이 바로 간위(奸僞)함이 들어나는 곳입니다. 그들의 갑자년에 만들어진 족보에는 충의공(忠毅公)아래 주(註)에 말하기를 7대손 이휘((爾輝)가 처음으로 숙종 정유년(서기1717숙종 56년)에 청원(請願) 했으나 원통하게 풀지 못하고 서울에서 객사 했다고 하며, 또 영조 신해 년(서기1731년 영조8년) 정구(鼎球)가 원통히 죽은 것을 풀어 줄 것을 요청하여 신원(伸寃) 되었다하며 정조(正祖) 무술년(서기1778정조3년)에 특별히 증시(贈諡)를 얻었다고 하며 치욱(致旭) 부자의 전후에 걸친 쟁사(爭事) 또한 같은 쟁사지만 소급하여 해당 관청의 문적(文籍=문서)을 살펴보니 이른바 이휘(爾輝)의 번거로운 호소가 숙종 정유년에 없으며, 그것이 영조 신해 년 정월에 있으며 처음에는 이른바 정구(鼎球) 요청으로 신원 되었다 하여 또 그들의 갑자년 족보를 살펴보니 이휘(爾輝)의 죽음은 이미 숙종 기해년(서기 1719숙종46년) 2월13일로 돼 있으며 치욱(致旭)의 쟁사에 말하기를 그 할아버지 홍련(弘鍊)과 그 형 홍준(弘俊)이 정조 무술년에 호소하여 증시(贈諡=증직과 시호)의 은혜를 받았다 하여 그 족보와 더블어 다를 바가 없으나 그 족보를 살펴 보면 홍련(弘鍊)의 죽음은 이미 영조 병신년(서기1776년) 5월27일로 돼 있는 것을 보면 이같이 황당하고 괴이(怪異)한 말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물며 순화군(順和君), 해안군(海安君), 김문기(金文起), 유한(柳僩), 김원량(金元亮)등의 시호를 의논한 것은 영조 갑오년(서기1774년 영조51년) 9월5일에 대신(大臣)들이 아뢴 것이지 저들이 이른바 신해 무술년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한 자도 당해 관청의 문적에 증거 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부단 간위하고 모순된 것을 말하는 것뿐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이전에 말하기를 무술년에 특별히 시호(諡護)를 추증(追證) 받는 은전(恩典)을 입었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이십년이 지난 다음인 기미년에 문화(文化)에 사는 김명규(金明圭)에게 싸워 가면서 교지(敎指)를 찾아 왔겠습니까 또 이휘(爾輝), 성창(聖昌), 정구(鼎九) 홍련(弘鍊), 태형(泰亨)등이 모두 서울에서 객사(客死=집밖에서 죽음) 했다는 것은 곧 저들 무리의 쟁사인데 세상에 어떻게 연달아 5대(代)가 객사 죽음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정황을 캐어 본다면 시호(諡號)를 추증한 교지(敎旨)를 찾아옴이 뒤늦게 된 사실을, 세월이 오래 지난 때문에 감추려고 하는데 지나지 않은 것뿐 입니다. 하물며 태형(泰亨)이 격쟁(擊錚)함이 기미년 보다 앞선 경술년 이었는데 도무지 시호(諡護)에 대한 일은 한마디도 언급도 없고 다만 군역(軍役)을 면하고 전토(田土)를 찾는 것 으로서 요점(要點)을 삼았으니 이것이 간사하게 거짓이 탄로 나는 곳입니다. 저들의 쟁사에 말하기를 계미년에 만든 족보는 저들이 만든 것이 아닌데 선조인 충지(忠之)의 이름이 어떻게 해서 부록(附錄) 되었는지 여기에 어떤 꿍꿍이속이 있는 것인지 의심된다고 하였는데 다만 충지(忠之) 한사람만의 부록이 아니라 갑자년에 만든 족보에 실려 있는바 있는 영시(永時)와 영수(永秀)도 또한 그아래 들어 있아옵고 계미년에 만든 족보에 이른바 충의공(忠毅公)의 손(孫) 구견(球堅)을 저들은 본래 저들의 선조가 아니어서 갑자보 가운데 빠저있던 들어있던 처음부터 저들과는 관계가 없다 하고 갑자보에 이른바 충의공(忠毅公) 손 충지(忠之) 이름아래 주(註)로 말하기를 초명(初名=처음이름)은 구견(球堅)이라 하였으니 이 구견(球堅)이 만약 계미보의 구견(球堅)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만들어낸 것입니까 저들은 저희 10대조 할아버지인 계훈(繼勳)을 일컬어 충의공(忠毅公) 손(孫)이 아니라 하고, 저들의 갑자보 가운데 충의공(忠毅公)의 아들 현석(玄錫)아래에 주(註)로 말하기를 초명(初名=처음의이름)이 계훈(繼勳)이라 했으니 이는 저들이 들은 사실이 아리숭 하여 세대를 잘못 알고 있음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오히려 감히 그 이름들을 모두 빼지 못 한것, 바로 이 점이 간사히 거짓말하여 탄로 나는 곳 이옵니다. 저들은 말하기를 김후종(金厚宗), 김후길(金厚吉)은 정말로 가까운지 먼지 촌수(寸數)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한성부(漢城府) 장적(帳籍)에 사노(寺努) 김후종(金厚宗)의 증조(曾祖)는 정병 (正兵) 충립(忠立)이고 사노(寺努) 김후길(김厚吉)의 할아버지는 논학(論鶴)이고 증조(曾祖)는 영시(永時)다 라고 했으니 영시(永時), 논학(論鶴) 충립(忠立)은 곧 저들의 연달은 3대의 선조들인데도 멀고 가까운 친족임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무슨 말 이겠습니까 사노(寺努)임을 감추기 위하여 스스로 그 조상을 숨기려 하는 것이니 간시히 거짓말함이 탄로 나는 곳입니다. 치욱(致旭)의 삼촌 도형(道亨)이 족보를 고처 거짓으로 만들었다 하여 관청에 붙들려 지금의 판부사(判府事)인 정만석(鄭晩錫)이 영남(嶺南=경상도)을 안찰(按察) 할 때에 엄한 형벌로 멀리 유배 시켰는데 치욱(致旭)이 도(道)에서 검사(檢査) 할 때에도 말하기를 파(派)와 계(系)가 혼란 되어 착오가 된 때문에 다른 김씨(金氏)가 족보에 붙은 것이 있어 과연 조율(調律) 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대개 당초에 족보를 만들때에 사노(寺努), 정병(正兵), 기병(綺丙)등이 허다한 자손들로서 충의공의 아들로 대를 계승한 것처럼 하여 갑자기 만드느라고 세대(世代)가 뒤 바뀌는 등 모양을 갖추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처음으로 갑자년에 만든 족보(甲子譜)에서 겨우 충의공(忠毅公)의 위로 3대(三代)의 이름을 고첬으나 그 아래로는 또 다시 체계를 이루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틈에 수많은 호,영남(湖,嶺南)의 정역(丁役)을 면해보려는 김성(金性)을 가진 사람들이 돈을 바리로 싣고 오가며 시끄럽게 호적(戶籍)에 붙인 까닭에 관청에 형을 받기에 이르고 유배되었으나 저들은 감히 족보에 대한 사건을 다른 사람들 때문이라고 떠넘기니 이도 간사란 거짓말이 탄로 나는 곳입니다. 저들이 말하기를 갑자보(갑子譜)는 과연 이것을 도형(道亨)이 간행한 것이나 한세대가 빠저서 충지(忠之)를 현석(玄錫)의 아들이라고 계통을 붙여놨다 호적을 대조해 보고 비로소 충립(忠立)이 빠진 것을 알고는 다시 원래의 족보를 들추어 세계(世系)의 차례를 얻었으나 충립(忠立)이 갑자기 현석(玄錫)의 아들로 들어가고 충지는 현석(玄錫)의 손(孫)으로 내리고 영시(永時)는 더 내려서 현석(玄錫) 증손(曾孫)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숭덕,병자(崇德,丙子)(서기1636년 인조14년)의 호구대장 가운데 영시(永時)의 영동 호구(戶口) 장적(帳籍)에 이르기를 아버지는 충지(忠之)이고 어머니는 원비(院婢) 은비(銀非)이고 삼조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만약 이들이 충의공(忠毅公)의 현손(玄孫)이라면 어찌 증조 현석(玄錫)의 이름을 알지 못하오며 그들의 쟁사에 말하기를 안동부(安東府) 상주호적(尙州戶籍)에 충립(忠立), 현석(玄錫), 문기(文起)의 3대가 모두 올라 있다고 하니 상주에 있으면 삼조(三祖)를 알고 영동에 있으면 삼조(三祖)를 모른다니 이 무슨 해괴한 말입니까. 또 저들이 말하는바 상주(尙州)의 호적에 말하기를 김처강(金處剛)의 아버지는 정속(定屬)된 노(奴)인 충윤(忠尹)이고 할아버지는 현석(玄錫)이고 증조 할아버지는 문기(文起)요 숙부는 충립(忠立)이며 사촌형이 충지(忠之)라고 했는데 갑자보에는 충지(忠之)는 상지(尙知), 명지(明知), 욱지(旭知) 세 동생이 있다고 했는데 홀로 충지(忠之) 로서 사촌 동생인 처강(處剛)의 호적에 입적 되었음은 지극히 의심스럽고 괴상(怪狀) 합니다. 하물며 충지(忠之)는 저들이 말하는 종손(宗孫)인데 처음에는 입적(入籍)되지 않았다가 먼 세대의 방계(芳系) 조상의 호적을 베껴 내어서 증거를 삼는단 말입니까. 한 조각 거짓으로 만들어진 문서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안동부(安東府) 소송하여 다락위에 두었던 장적(帳籍)들을 찾아본즉 충지(忠之)나 비슷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다시 본부(本部=漢城府))에 소송하여 그들의 거짓된 호적을 들추려 하였는데 이른바 치욱(致旭)이란 사람은 법정에 나사서 머리를 맞댈 것을 겁내고서 이미 모르는 지역으로 도주(逃走)하여 모습을 나타내지 않더니 지금에 이르러 거짓으로 만든 문적으로써 감히 쟁사(爭事)의 자료에 넣은 것이니 천번 만번 죽어도 오히려 나머지가 있을 죄를 지은 것입니다. 또 충의공(忠毅公)의 아들 현석(玄錫)을 일컬어 오희보(吳希保)의 사위라 하여 그 증거로 삼고자 해서 동복오씨(同福吳氏) 족보를 얻어 왔다는 것은 처음에는 한 장의 종이 조각에 베낀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요즈음 이른바 간행했다는 것도 또한 이것도 한조각 종이 인 것이니 세상에 어찌 전체의 족보에서 한 장만 떼여서 빌려 주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제가 오씨(吳氏)의 족보를 살펴본즉 처음부터 현석(玄錫)이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저의 11대 할아버지 현석(玄錫)은 옛적에 돌아가신 길창위(吉昌慰) 권규(權跬)의 손자사위이며 그 아들인 계훈(繼勳)과 더불어 분명히 함께 안동 권 씨 족보에 실려 있으니 이를 보면 저들의 간사한 거짓이 탄로 나는 것입니다. 이른바 갑자 보에 말하기를 충의공(忠毅公)에게 다섯 아들이 있으니 큰 아들은 현석(玄錫)이고 다음은 인석(仁錫), 다음이 원석(元錫), 다음이 의석(義錫), 다음이 정석이라고 하나 저의 11대 할아버지 현석(玄錫)에게 다른 형제가 없음은 저희 족보만 홀로 그런 것이 아니라 공적(公的)인 문적(文書) 에서도 명백히 살필 수 있은 즉 이 어찌 간사한 거짓이 탄로 나는 것이 더욱 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진실과 더러움이 벗겨지는 것은 비록 삼척동자라도 한번 들으면 알 수 있는 것인데도 이른바 을유년 검사관이었던 영동현감(永同縣監) 남준성(南駿聲)이 치욱(致旭)의 무리가 주는 수천금의 뇌물을 받아 저를 누르고 저들을 부추기어 오직 터무니없는 것을 꾸며 낸 것을 끌어 붙이려 하였으나 그 터무니없는 조작들을 모은 것이 억지 말이 아닌 것이 없으니 많은 변명이 필요 없는 것인데 두세 가지만 부득이 우러러 아뢰는 것입니다. 안동권씨족보(安東權氏族譜) 가운데 11대 할아버지 이름 현석(玄錫)이 석현(錫玄)이라 쓰여 있고 현감(縣監)은 생원(生員)이라고 기록된 것을 지적하여 충의공(忠毅公)의 아들이 아니고 분명히 이는 가락왕(駕落王)의 후손이며 가락계(駕落系)의 직계손(直系孫)인 진사(進士) 김제민(金濟民)의 집안 파보(波譜) 가운데 석현(錫玄)이하 여러 계대(繼代)가 실려 있다 하므로 치욱(致旭)의 무리와 더블어 같이서 김제민(金濟民)의 집에 가서 그 족보를 세세히 살펴보았으나 제 조상들은 하나도 들어있지 아니 하였는바 곧 그 사실을 년(年)전(前)에 예조판서(禮祖判書) 서준보(徐俊輔)에게 아뢰 엇더니 과연 이치가 엄연하게 논리적으로 판단한 후에 치욱(致旭)의 무고(誣告)는 가히 알 수 있고 너희가 가락 계 후손도 아님이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이제 올바르게 끝지어 졌으니 그리 알라고 하는 말씀을 하였으므로 이것에 대해서는 다시 밝힐 필요가 없을 듯 하오며 현(玄)자와 석(錫)자가 서로 뒤바뀌어 족보가 간행된 것은 권씨(權氏)들이 족보를 간행할 때 사위들의 이름을 잘 살피지 못하여 뒤바뀐 것이 아닌 가 생각 됩니다.
    이러한 일이야 괴히 생각 할 일이 아닐뿐더러 하물며 현석(玄錫)의아래 아들 계훈(繼勳)이 분명하게 실려 있고 현석(玄錫)의 손자인 자용(自鎔)이 또 권시민(權時敏)의 딸과 혼인 하여 그 아들인 희년(禧年), 덕년(德年)이 모두 권씨(權氏)들 족보에 실려 있으니 이러한 연이은 4대가 기록된 믿을 수 있는 문서인 안동권씨족보(安東權氏族譜) 를 버리고 음과 획수가 똑 같은 글자의 위치가 위아래로 바뀌어 진 것을 가지고 의심 할 수 있는 단서라고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현감(縣監)을 생원(生員)이라 기록 한 것에 대하여는 저도 일찍이 의심을 가져 보았으나 또한 진정하여 말씀 드릴 수가 있습니다. 대개 삼대(三代)에 걸쳐 금고(禁錮)의 형벌을 당한 나머지 희미한 후손이 한 오라기의 실마디처럼 7-8대에 걸쳐 오랫동안 내려오다 보니 공(公), 사(私)의 문적들은 하나 같이 증거 될 만한 것이라곤 없어 졌고 선조(宣祖)때 판서(判書) 벼슬을 지낸 정립(鄭雴)이 지은 빙후록(憑後錄)과 운강연담(雲岡軟談=판서 정립의 방손 정관주 정경의 허락을 얻어 빙후록의 필사본)에 모두 생원으로 쓰여 있으니 이미 수백 년이 지난 뒤에 믿고 의지 할 것은 이것 뿐 이온데 파보(派譜)와 안동권씨족보(安東權氏族譜)에 모두 생원으로 기록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거든 읍보(邑報)에서 이것들이 간행 된 책이 아니고 판서(判書) 정립(鄭雴)이 알지 못 하는바 라고 하여 한 지방의 수백 년 내려온 문헌(文獻)을 믿으려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제 할아버지 담(潭)이 대대로 살아오던 안의(安義)에서 영동(永同)으로 옮겨 살던 때에 전에 적몰된 재산을 찾으려고 홍윤성(洪允成)의 외손인 윤 씨 집안과 논쟁을 벌여 격쟁까지 해서 되돌려 받아 수년간 세조(稅組)를 거두어들이다가 불행하게도 일찍 돌아가시고 제 아버지마저도 삼년상을 마치지 못하고 또 돌아 가셨는바 이웃에 살던 외손 이 씨의 집에서 대신 곡식을 거두려는 사이에 치욱(致旭)의 아버지 태형(泰亨)의 무리가 이때를 틈타서 스스로 충의공(忠毅公)의 자손이라며 뺏으려 하자 전(前) 주인이던 윤 씨의 과부가 또한 태형(泰亨)이 진짜 후손이 아닌 것을 알고서는 말하기를 이왕 충의공(忠毅公) 본 손이 못 가져 갈 땅이라면 내가 주인이다 라고 하고서 군(郡)과 도(道)에 그 내역을 올려 만족한 통보를 받은 까닭으로 그들의 무리가 다시 트집을 잡지 않더니 태형(泰亨)이 경술년(庚戌年)의 쟁사 에서는 감히 태형(泰亨)의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전민(田民)을 되돌려 받았다가 죽은 뒤에 윤 씨 집에서 다시 빼앗아 갔다고 하고 있으니 이는 저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의 일을 훔쳐서 그들의 간계(奸計)를 이루어 보려다 끝내 이루지 못한 다음에 치욱(致旭)의 격쟁(擊錚)에서 감히 저희(成彦) 할아버지 담(潭)의 이름을 바꾸어 자기 할아버지인 홍련(弘鍊)인 것처럼 꾸미고 전토(田土)를 되돌려 받으려고 호소를 올렸다는 것을 홍련(弘鍊)이 늦게야 듣고서 즉시 한성부(漢城府) 에 알려 잡아 가두려하니 도망 가버렸다는 말을 썼으니 한 마디로 그 간악한 심계(心計)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전 토(田 土)를 본래 후손(後孫)에게 주었다는 것을 저들의 부자(父子)는 되풀이하여 말하기를 영조 (英祖)신해 년에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족보를 살펴보면 홍련(弘鍊)이 죽은 것은 이미 신해 년((서기 1731년)보다 앞선 병신년(서기1716년)이라 돼있은즉 저들이 이른바 늦게야 듣고서 한성부(漢城府)에 글월을 올렸다 함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났다는 것입니까? 저들의 쟁사에 또 말하기를 충의공(忠毅公) 아버지 묘(墓)를 수호 하고 이어 모셨다는 말을 듣고서는 마음이 아파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릅니다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에 제가 어리고 어리석어 유리걸식하고 있을 때에 도형(道亨)의 무리가 본손(本孫) 이라고 하면서 가짜 족보 속에 있는 족당(族黨)들을 많이 거느리고 매년 성묘하면서 저는 한발도 들여 놓지 못하세 하면서도 점점 오랜 햇수가 되어 비석(碑石)을 세울 지경이 되었는데 비문이 잘못 되여 계대의 뒤집어 짐이 갑자 보와 계미 보의 거짓말 들 보다도 심하기 때문에 제가 예조에 아뢰어 비석을 철거 하라는 관문이 있었으나 해당 고을에서 거행하지 않은 듯 하옵고 충의공(忠毅公) 할아버지 산소는 충의공(忠毅公)의 아버지와 아주 가까운 땅에 있어 제집에서 오늘날 까지 지키고 있는데 저들의 무리는 처음에는 누구의 묘(墓)인지 모르고 있다가 이어 모셨다는 말을 하니 더욱 가슴 아프게 생각 하거늘 우리 고을 검사관은 그것을 옳게 가려내려 하지는 않고 다만 뇌물로 주는 돈에 의해 그들의 말만을 따라서 위에 보고하니 애당초 소송을 검사하는 체제가 아니옵고 제집의 장적(帳籍)은 충의공(忠毅公)의 증손인 자용(自鎔)으로부터 천계원년 신유년(서기1521년광해14년)의 식년호적(式年戶籍)에 들어 있는데도 도(道)의 검사관은 충의공(忠毅公)의 아들과 손자가 장적에 들어 있지 않다고 트집 잡고 잇으나 충의공(忠毅公)의 현손(玄孫)인 희년(禧年)과 덕년(德年)이 임진왜란의 혼란기를 만났고 덕년(德年)의손자 정윤(定胤))의 호적에 자용(自鎔)이 그의 증조로 처음 실리게 되었음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 일진대 하필이면 병란(兵亂) 가운데 타 없어진 호적을 소급하여 구하라 하오며 도(道)의 검사관이 말하는바 제집은 영조 신해년(서기1731년)부터 갑신년(서기1824년 헌종25년) 까지 90년이나 되는데 어찌하여 아무 말이 없다가 지금에야 여러 가지 말로 호소하느냐고 하는 것은 다만 저들의 무리가 주장하는 정구(鼎球)와 홍련(弘蓮)이 신해년(서기 1731년)에 억울함을 호소하여 억울함이 풀렸고 무술년에 임금에게 아뢰어 시호를 얻었다는 말을 믿어 반드시 단안을 내리고자 함인데 공적(公的)으로 밝힐만한 기록이 없고 간행된 족보에도 홍련(弘鍊)이 그들이 주장하는 격쟁 사실 이전에 이미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검사관(檢査官)과 도(道)에서는 어떤 과연 바꾸지 아니할 믿을만한 증거가 있 길래 이다지 경박한 심리를 하는 것인지 들추어 변론하고 마음도 없게 되었으며 고을의 검사관이 말하는바 그 사람이 아버지의 나이가 60이 넘었다고 하고서는 다시 그가 불행하게도 일찍 돌아 가셨다고 대답한 것은 하늘을 속이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더욱 언어를 가지고 희롱하는 것으로 분통을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때에 검사관이 묻기를 제아버지가 죽은 것은 몇 년쯤 되었느냐고 하기에 제가 대답하기를 거의 60년 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를 보고 할 때는 바꾸어서 나이가 60이 넘어서 죽었다는 말로 임금을 속였다고 협작(協作)하고 거짓말 하였으니 이를 참아야 됩니까? 정말 참을수 없는 일입니다. 이밖에도 힘써서 저들을 부추키는 일은 말로서는 다 들출 수 없습니다. 치욱(致旭)의 무리가 간사하게 거짓으로 만들어 탄로 나는 곳은 하나같이 화(禍)를 입은 집안의 무식의 소치(騷致)로 돌리더라도 심지어 사원(寺院)의 노비(奴婢)나 아전(衙前)과 양인(良人), 정병(正兵)과 기병(騎兵), 가선(嘉善)이나 통정(通政)등이 어지럽게 섞이고 할아버지와 손자가 족보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며 형제의 숫자가 늘었다 줄었다하며, 이름도 이랬다 저랬다하며 살던 곳도 금방 종적이 있다가 없다가 매우 추잡스럽고도 흉악한 정황을 가르켜 내력(來歷)이 분명하다고 하는 것은 이 무슨 뱃장이오며 저를 조사한 곳에서는 털을 가려 흠을 고르듯 꼬치꼬치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위에 말한 여러 가지 조목들을 오히려 많이 거짓을 꾸몄다고 하고 또 심지어는 전현(前賢)의 믿을만한 사적(史蹟)과 관청의 장적(帳籍)을 일컬어 참고하여 증거 할 수 없다고 하고 또한 심지어 치욱(致旭)의 조상의 무리 중에 사원노비(寺院奴婢))가 있음은 이것이 화(禍)를 당한 집안이라는 명확한 증거라고 하고 저희 집은 금고(禁錮)를 삼대나 한 집안에 약간의 관직(官職)이 있다 지목(指目)해서 충의공(忠毅公)의 자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어찌 그 뇌물(賂物)을 탐내는데 급급하여 스스로의 무식(無識)한 행동인줄 깨닫지 못 합니까. 대개 화(禍)를 당한 집안의 처자(妻子)는 관노비(官奴婢)로 정속(定屬)되고 그 집의 노비(奴婢)는 사원노비(寺院奴婢)로 정속 되는 것이니 곧 이러한 법의 예로 어찌 충의공(忠毅公)의 자손이 사원노비(寺院奴婢)일 까닭이 있을 수 있으며 제8대조 할아버지(禧年)과 덕년(德年) 형제분이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을 얻은 것이 충의공(忠毅公)이 신원(伸寃) 도기 전에 있었던 것은 대개 같은 때의 충신이 박팽년(朴彭年)의 현손인 계창(繼昌)이 선조 신미년(서기 1571년 선조5년)에 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이 되고 그 아들 충윤(忠胤)이 제용감(濟用監) 주부(主簿)가 되었던 것도 박팽년(朴彭年)이 신원(伸寃)되기 전입니다 또 황보(皇甫), 정(鄭), 김(金) 세 재상의 자손도 대부분 그들이 신원(伸寃)되기 이전에 벼슬을 하였는데 어찌하여 홀로 저의 선조인 충의공(忠毅公)의 현손(玄孫) 하나만 이러한 너그러운 은전이 없었겠습니까. 그때의 조사관(調査官)과 도(道)의 관리가 한결같이 한쪽을 누르고 한쪽을 두둔하는 몰지각한 행동에서 빚어진 일이 아닌 것이 없기에 도무지 자꾸만 따지고 싶지 않지만 오로지 이 하늘과 땅에 사무치는 원통함에서 부득이 한번 원통함을 깨끗이 씻으려는 길일 따름입니다. 이런 일은 선조(先祖)가 탁월한 충신(忠臣)인데 본 계(本系=자손이 아닌 사람)아닌 무리들이 욕되게 제사 지내는 것이 더 할 수 없이 더러운 일이며 하물며 그들의 계대(繼代)를 거꾸로 하고 이름도 고처서 사원노비(寺院奴婢)의 자손이 그 거짓 족보를 세상에 펼 처야 하겠습니까. 저는 지금 만 번 죽어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이러한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주 외람된 죄를 범하는지를 말아야 되는데 이렇게 엎드려 호소 하옵나이다. 천지(天地)요 부모이신 임금님께서 특별히 불쌍히 여기시어 양쪽의 족보와 한성부(漢城府)의 호적(戶籍)을 세밀하게 참고 하시어 명확한 진상을 시원하고 올바르게 결정하신 뜻을 받드는 관리에게 시켜 빠른 시일 내에 그 결과를 아뢰도록 하시어 위에서 열거 한바 김치욱(金致旭)무리의 거짓과 속이는 죄를 낱낱이 법조문(法條文)에 맞추어 엄하게 다스려 주시오면 저는 조상의 당한 조작된 치욕을 씻을 수 있으니 종파(宗派)의 올바름을 밝혀 주실 것을 천만번 울면서 비오니 임금님의 처분(處랍)을 바랍니다.

    임진년 구월 초엿새(서기 1832년 순조32년 9월 6일)



    ※ 金成彦(김 성언): 경주김씨 백촌공파 金 文起(김문기)의12대손



    예조계목(禮曹啓目) 풀이

    영동(永同) 선비 김성언(金成彦)이 격쟁(擊錚)한 진정(陳情)에 따라 형조계목(刑曹啓目)중에
    예조(禮曹)가 답변을 올려야 한다 하였기에 그 진정서(陳情書)를 살펴보니 그의 12대 충의공(忠毅公) 문기(文起)후손의 계통(系統)을 가려종파를 보전케 하여 달라는 것 이었습니다

    김성언(金成彦)의 것은 그의 선조(先祖)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와 그 아들 현석(玄錫)이 육신의 사화에 같은 때 목숨을 같이 하였고 사화를 겪은 집안의 후손이 외딴 고을로 흘러 들어가 겨우 명맥을 보전하고 있었더니 뜻밖에도 김치욱(金致旭)이 남몰래 가짜 족보를 만들어 함부로 문기(文起)의 자손이라 하고 대수를 이어 붙이고 부조 묘라 하면서 외람되이 신주(神主)를 만들고서 도리어 성언(成彦)이 문기(文起)의 자손이 아니라고 갖가지 중상모략을 한다 하였고,

    김치욱(金致旭)의 내용은 그의 선조(先祖) 김문기(金文起)의 자손이 상주(尙州)에 노비(奴婢)로 내려진 뒤에 외진 시골에 묻혀 양반의 계급을 갖지 못한 것이 오래되어 증조 때부터 선조(先祖)의 억울함을 선조의 억울함을 호소하다 길에서 객사(客死)하였고 그의 양부(養父) 종철(宗喆)이 비로소 문기(文起)의 시호교지(諡號敎旨)를 문화(文化)의 김명규(金明圭)한테서 찾아왔더니 생각지도 못한 김성언(金成彦)이 본손 이라면서 싸워오기를 마지않고 있으나 성언(成彦)의 11대 할아버지가 석현(錫玄)이란 이름으로 권씨(權氏)의 족보에 올라 문기(文起)의 아들 현석(玄錫)이 아님이 분명하여 도(道)의 조사관이 그를 패소(敗訴) 시켰다 라고 하고 있어서, 그들 양쪽의 보 책(譜冊=족보)과 경조(京兆)의 호적(戶籍)을 가져다 살펴보니

    성언(成彦)쪽은 그의 십 이대 할아버지 문기(文起)에서 7대 할아버지 의봉(義鳳)까지 파보에 실려 있으며 그의 9대 할아버지 자용(自鎔)이 천계 신유 년(서기1621년 광해군 13년) 호적에 들면서부터 성언(成彦)의 아버지 종석(宗碩)까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현석(玄錫)이 석현(錫玄)이라 권 씨 족보에 올라 있는 것이 과연 의혹되는 곳이나 김해(金海)로 관향(貫鄕=본관)이 되어 있고 계훈(繼勳)이 아들로 되어 있는 것이 별도의 다른 사람 같게는 생각되지 않으나 자못 족보가 심히 모호하여 그것을 가지고는 확증을 할 수는 없을 듯하나.

    치욱(致旭)쪽은 그들의 계미, 갑자 두 족보의 대수와 이름자가 전연히 서로 어긋나고 문기(文起)의 이름이 문기(文杞)로 되어 있으며 현손인 충지(忠志)가 갑자보(甲子譜)에는 문기(文起)의 손자 충지(忠志)로 되어 있고 문기의 손자 이름인 구견(球堅=계미보)이 갑자보에 충지(忠志)의 초명(初名)이었다 하기에 그 나이를 참고하여 보니 충지(忠志)의 나이 구십이 넘어서 영시(永時=충지의 아들)가 태어난 것을 보면 거짓으로 족보를 만든 흔적이 완연히 들어 났습니다.

    치욱(치욱)에 관하여 호적을 거슬러 조사하여 보니 그의 십 대조 충지(忠志)가 어떤 곳은 충지(忠之)였고 어떤 곳은 충개(忠介)였고 어떤 곳은 정병(正兵), 어떤 곳은 기병(騎兵)이었다 하였으며 아들 영시(영시)는 사(寺)의 종 이었고 그 어머니 (충지의처)는 원(院)의 종(종)이었으며 삼조(三祖)를 모른다고 하였으니 치욱(致旭)이 와 같은 미천한 출신으로 가짜 족보를 만들어 충신(忠臣)의 후예(後裔)인양 꾸민 것은 만 번 악질적이고 교활 할뿐더러 조정의 처분 없이 가짜 부 조묘를 지은 것 또한 세상을 속이는 죄목에 관계되니 김치욱(金致旭) 그가 살고 있는 도(道)에 명하여 엄하게 매질하여 귀양 보내시고 그 사우(祠宇)는 헐고 신주(神主)를 묻어버려 서로 싸우는 단서를 막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道光13년(서기1833년 순조 33년) 5월20일 행(行)

    우승지(右丞旨) 박래겸(朴來謙)아뢰여 아래와같이 임금님의 윤허(允許) 하심을 맡다

    예조(禮曹)에서 조사 한 대로 임금님의 재가(裁可)를 얻어 전조(典曹)로 하여금 계목(啓目)에 말한 대로 영동(永同) 김 성언(金成彦)이 격쟁(擊錚) 한 진정에 따라 지례(知禮) 김치욱(金致旭)을 엄히 매질하여 귀양 보내고 가짜로 지은 사우(祠宇)는 헐어 버린 뒤에 마땅이 그 전말을 보고 하라


    형조관자(刑曹關子)풀이

    관찰사 겸 도순찰사가 조사하여 형조에 올린 공충도(현재충청도) 영동 선비 김진횡(金振鐄)과 전라도 동복 선비 김지달(金志達) 등의 이름으로 된 소지에 저희들은 단종 조(朝) 충신
    이조판서 시(諡) 충의공 백촌 선생 휘 문기(文起)의 13대손입니다 충의공의 고고하신 충의와 높은 절개는 사육신과 가지런한 미담으로 해와 별처럼 빛나니 저희들의 번거로운 말이 없더라도 거의 아실 것입니다. 가문이 불행하여 종통을 간사한 패거리들에게 빼앗겨 날조된 치욕이 선조들에게 미치니 무너져 내리는 애달픈 심정을 붙잡고 하소연 할 곳조차 없읍니다 저 진횡(振鐄)의 아버지 성언(成彦)이 여러 번 임금님께 호소하여 형조에서 족보와 호적 그리고 여러 집안 족보를 가져다 참고하고 예조에 까지 보내 예조에서 전후 글들을 자세히 조사 해 본 다음 김치수(金致秀), 원형(元亨) 홍운(弘運) 패거리가 충신의 후예인 것처럼 꾸미고 부 조묘를 지은 죄로 그들이 살고 있는 도에 명하여 엄히 매질하고 귀양 보내고 사우는 헐고 신주는 묻어야 할 것이다.(국립도서관소장6=6024-5호1833년순조실록편)) 라는 내용을 임금님께 올려 윤허가 내림에 그들이 살고 있던 도에서 담당 관리들의 회합까지 있었습니다. 예조에서 임금님께 올렸던 내용들은 등본을 떼어 보시면 한눈으로 알아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진위(眞僞)가 가려지고 시비옥석(是非玉石)이 분명 하여 졌는데도 저의 선조(先祖) 복관작교지(復官敎旨)와 시호교지(諡號敎旨)가 아직 까지도 경상도 지례(知禮=금릉) 치수(致秀), 홍운(弘運),원형(元亨)의 집에 남아있어 저희들은 외롭고 잔약한데다가 그들 패거리는 성세(盛世)가 그지없어 아직 찾아와 모시지 못하고 있으니 저의 마음의 급박한 정황이 날로 간절하여 이에 감히 여럿이서 형조에 나란히 호소하오니 곧 바로 관자(판결문)를 경상도에 내려 보내 교지를 찾아다 저희들이 예도(禮道)에 맞게 받들게 하여 주십시오 또 원통한 것은 여러해 전 홍운(弘運), 원형(元亨) 패거리가 충현(忠賢)의 후예인양 자칭하고 성을 김씨(金氏)로 하는 자들을 불러 모아 함께 만든 가짜 족보가 삼남(전라도,경상도,충청도)에 가득하니 그 책략(策略)이 뇌물 자금을 모으려는 데서 출발 한 것이었으나 보계(譜系)가 문란(紊亂) 하게 되어 저의 선조(先祖)를 그들의 선조(先祖)와 바꾸어 인륜과 풍속을 어지럽힘이 이에 더 심할 수가 없으니 또 한 번 관자를 삼남(三南)의 각도에 발송하여 그들이 펴낸 가짜 족보를 일일이 거두어 모아 불사르시게 하고 사회 풍속을 어지럽힌 그들의 죄를 엄하게 다스려 기강을 바로 잡아 주실 것을 호소 합니다 하였으니 작년여름(서기 1833년 순조33년)여름 예조에서 올린 계목에 의하여 이미 진위(眞僞)가 가려졌고 시비(是非)가 분명하여 김치욱(金致旭)은 매질하여 귀양 보냈고 사우(祠宇)는 헐어 버렸으나 가짜로 찍어낸 족보가 진실로 호소 한대로라면 세계(世系)를 바꾸어 인륜과 풍속을 해침이 이보다 심할 수는 없을 것이니 도내에 있는 것을 모두 거두어 불태운 다음 그 전말(顚末)에 대해 올린 보고서를 마땅히 여러 읍(邑)에도 알려 시행(施行)케하라

    관자(판결문)를 이에 내리니 조사하여 시행하라

    道光 14년 삼월 이십일(서기 1834년 헌종원년)

    *김진횡(金振鐄):경주김씨 백촌공파(김문기)의13세손(金成彦의 長子)



    경상도 감영에서 지례현에 보낸 판결문(1)

    전일 예조(禮曹)의 관자(關子=판결문)에 따라 신주(神主)는 매안(埋安=땅에 묻음) 하였고 가짜족보는 효주(××로 연이어 하여 알아볼 수 없게 만듦) 하였으며 그밖에 임금님께서 내렸던 글들과 교지(敎旨)를 치욱(致旭)의 집에서 방치(放置)하는 것이 결코 서울에서 보내준 본의가 아니니 호소해온 내용을 자세히 조사하여 하나하나 찾아 보낼 것이며 가짜 족보는 비록 전일에 효주 하였다 하나 혹시 빠진 것이 있으면 그대 현(縣=知禮)에서 즉시 찾아 모아 효주 한 뒤에 그 전말(顚末)의 내용을 마땅히 보고 하라.




    경상도 감영에서 지례현에 보낸 판결문(2)

    영동(永同) 선비 김진횡(金振鐄)이 백촌 선생(白村先生)의 복관교지(復官敎旨)와 시호교지(諡號敎旨) 그리고 현감공(玄錫=충의공의 아들)의 교지(敎旨)및 영조(英祖)의 성지(聖旨)를 지례(知禮=金陵)의 김치수(金致秀)에게서 찾아 주십시오. 하는 등으로 9월 달에 호소(呼訴)하여 왔기에 그에 대한 허락(許諾) 판결문(判決文)을 보냈더니 얼마 아니하여 그 사람이 다시 호소(呼訴)한 글에 이르기를 조사(調査)하여 돌려주려는 뜻은 조금도 없고 임금님께서 허락(許諾)하여 내린 글을 가져오라 한다고 하였다 이번 송사(訟事)는 임금님의 윤허(允許)로 결정(決定)된 것이니 결단코 내려 보낸 판결문(判決文)에 따라 시행(施行) 되어야 할 것인데도 지금까지 질질 끌어 억울함을 호소(呼訴) 하니 무슨 까닭인지 알지 못 하겠다. 이 관자(關子=판결문)를 보는 즉시(卽時) 전(前)에 내린 판결문대로 속히 거행(擧行) 한 뒤 그 전말(顚末)을 자세히 조사(調査)하여 마땅히 보고(報告) 하라


    *위에 네용은 국립 중앙도서관에 古5025-5 열람하시면 원문 보관 돼 있으며
    1833년(순조33년) 9월9일 김 치수 격쟁에서도 본내용을 확인하고 있음




    이전글 : re:경주김씨 백촌공파 족보를 확인할려면...
    다음글 : re:파벌에 대해서 문의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29번길 9 (심곡2동) 봉호B/D 401호| 관장 : 김 원 준
    전화: 032-654-4788, 02-2699-2693  | Mobile : 010-4000-6357  | 팩스: 032-654-4788
    Copyright ⓒ 2003 JOKBO.re.kr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