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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陽州) 조(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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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조씨(楊州趙氏)

양주(楊州)는 경기도(京畿道) 중앙 남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매성군(買城郡) 혹은 창화군(昌化郡)이라 하였는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내소(來蘇)를 고치고 고려(高麗) 초에 견주(見州)로 승격하였다가 1668년(현종 9) 양주(楊州)에 속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는 다시 양주(楊州)로 개칭한 뒤 1895년(고종 32) 목(牧)을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양주 조씨(楊州趙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내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추증된 조 잠(趙 岑)이다.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조선시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는 고려 때 사람인 군우(君祐)의 손자이며, 경질(景質)의 아들이라 전(傳)하고 있다. 후손들은 잠(岑)을 시조(始祖)로 하고 양주(楊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잠의 증손(曾孫) 계생(啓生)이 고려 우왕(禑王) 때 문과에 올랐으며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후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고, 문장(文章)이 뛰어나 학자(學者)로 이름을 날렸다.
계생의 동생 말생(末生)은 태종(太宗)의 총신(寵臣)으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고, 세종(世宗) 때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영중추원사(嶺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선(璿)은 태종(太宗)의 부마(駙馬 : 임금의 사위)로 한원군(漢原君)에 봉해졌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극관(克寬)은 계생(啓生)의 맏아들로 태종(太宗)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정자(正字)·우정언(右正言)·지평(持平)·이조 정랑(吏曹正郞) 등을 거쳤고, 세종(世宗) 때 병조(兵曹)와 형조(刑曹)의 참판(參判)을 지냈다. 말생(末生)의 7세손 정(挺)은 충수(忠秀)의 아들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대사성(大司成)·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거쳐 광해군(光海君)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가문의 세력을 팽창시켰다. 한편 남(擥)의 아들인 존성(存性)은 선조(宣祖)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형조(刑曹) 및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부총관(副摠管)을 역임했으며 1624년(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검찰사로서 왕을 공주(公州)로 호종(扈從)하였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세자(世子)를 따라 전주(全州)에 갔다 돌아왔다. 존성(存性)의 아들 창원(昌遠)은 인조(仁祖)의 국구(國舅 : 임금의 장인, 그의 딸이 인조비 장열왕후)가 되어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해졌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으며, 동생 계원(啓遠)은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특히 계원(啓遠)의 아들 7형제 중 둘째 귀석(龜錫), 셋째 희석(禧錫), 넷째 사석(師錫)과 다섯째 가석(嘉錫) 등이 뛰어나 가문의 번창을 누렸다. 한편 숙종(肅宗) 때 노론(老論) 4대신의 한사람인 태채(泰采)는 군수(郡守) 희석(禧錫)의 아들로 1686년(숙종 12)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역임한 후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며 세제(世弟 : 영조) 책봉을 건의하여 이를 실현시켜 세제로 하여 대리청정(代理廳政)을 하게 했으나, 유봉휘(柳鳳輝)를 비롯한 소론(少論)의 반대로 대리청정의 명이 철회되자 사직하고 이어 소론의 과격파 김일경(金一鏡)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으로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사사(賜死)되었다.
태구(泰耉)는 우의정 사석(師錫)의 아들로 1686년(숙종 1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한 후 설서(說書)·문학(文學)·승지(承旨) 등을 거쳐 부제학(副提學)·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냈고,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가서 외교적인 공적을 쌓았으며 1720년(숙종 46)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그 밖에 좌참찬(左參贊)과 호조 판서(戶曹判書) 등 여러 벼슬을 두루 역임한 운규(雲逵)와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동지 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영순(榮順)이 유명했다. 근대에 와서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영의정(領議政) 두순(斗淳)과 좌의정(左議政) 병세 (秉世)가 있다. 두순(斗順)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지내고 1849년(철종 즉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실록청 도청당상(實錄廳都廳堂上)이 되어「헌종실록(憲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이어 「동문휘고(同文彙考)」의 찬집당상( 輯堂上)을 지냈다. 병세(秉世)는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기울어 가는 국운(國運) 앞에 충의(忠義)를 다한 명신(名臣)이다. 그는 1859년(철종 10) 문과에 급제하였고, 고종(高宗) 때 함경도 암행어사(咸鏡道暗行御史)로 나가 탐관오리들의 비리를 논척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돌아와 대사성(大司成)에 승진되었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을 주청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고종을 만나지 못하자 민영환(閔泳煥)·이명근(李命根) 등과 함께 백관(百官)을 이끌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연소(聯疎)했으며, 이어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석고대죄(席藁大罪)하며 을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소(遺疎)와 동포(同胞)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5,462가구, 23,22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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