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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開城) 최(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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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開城)

개성(開城)은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려의 수도였으며, 처음에는 송악군(松岳郡), 송도(松都), 개경(開京), 부소갑(扶蘇岬), 동비홀(冬比忽), 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리웠다. 919년(고려 태조 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이 곳 송악산 남쪽으로 옮긴 후 개성(開城)과 송악(松岳)을 합쳐 개주(開州)라 불렀고, 960년(광종 11) 황도(皇都)로, 995년(성종 14)에는 개성부(開城府)로 고쳤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06년 개성군이 되고,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개성시(開城市)가 되었다.
개성 최씨(開城崔氏)의 시조(始祖) 최우달(崔佑達)은 원래 황주(黃州) 토산현(土山縣) 사람으로 신라조에 대상(大相)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응(凝)이 태조를 도와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여러 관직을 지내고 누대(累代)에 걸쳐 개성(開城)에 세거(世居)하며 호족(豪族)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우달(佑達)을 시조(始祖)로 하고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우달의 아들 희개공(熙愷公) 응(凝)은 개성 최씨의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에 대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어머니가 애기를 배었을 적에 그 집에 누런 오이 덩굴이 있었는데 갑자기 참외가 맺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궁예(弓裔)에게 알렸다. 궁예가 점을 쳐보게 하니, "사내아이를 낳으면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니 아예 키우지 못하게 하십시오"하였다. 그 부모가 숨겨서 길렀는데, 그후 이미 장성하여서는 오경(五經)에 통달하고 글짓기를 잘하여 궁예 밑에서 한림(翰林)이 되어 매우 존경을 받았다.
915년(신라 신덕왕 4) 궁예가 왕건(王建)을 불러들여 모반(謀叛)의 누명을 씌울 때 왕건이 변명을 하자 응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줍고자 뜰에 내려와서 왕건에게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귀띰해 주어 화를 면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왕건과 가까워져, 고려가 개국하여 왕건이 즉위하자 원봉성사(元鳳省事)를 거쳐 광평 낭중(廣評郎中)으로 승진하고 이어 내봉경(內奉卿), 광평시랑을 역임하며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932년(태조 15)에 그가 35세로 죽으니 태조가 매우 슬퍼하며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증직했다. 이외 후손 천보(天寶)가 조선에서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했으며, 그의 증손 명창(命昌)은 1504년(연산군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수찬(修撰)을 지내고, 1519년(중종 14)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일찍이 이 이(李 珥)의 문하에서 글을 읽어 문장과 시에 능하였던 입( )은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여러번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그곳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名文章家)라는 격찬을 받았으며 그의 글과 차천로(車天輅)의 시(詩), 한 호(韓 濩)의 글씨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개성 최씨(開城崔氏)는 남한에 총 716가구, 3,3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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