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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濟州) 양(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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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양씨(濟州梁氏)
시 조 휘(諱): 양을나(梁乙那)

제주(濟州)는 한반도(韓半島)의 남서 해상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대의 섬(島)으로 명칭은 도이(島夷), 주호(州胡), 탐모라(耽牟羅), 섭라(涉羅), 탁라, 탐라(耽羅), 제주(濟州) 등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려왔다. 신라(新羅)의 속국(屬國)이었던 탐라국(耽羅國)은 938년(태조21) 고려(高麗)의 속국이 되었고, 숙종(肅宗) 때는 군(郡)을 설치하여 직접 다시르다가 1153년(의종7) 군을 현(縣)으로 고쳤으
며 1211년(희종7)에 탐라를 제주라고 개칭하였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오랫동안 전래되어온 성주(星主), 왕자(王子)의 칭호가 폐지되고 실질적인 행정력 속에 포함되어, 1416년 한라산을 경계로 산북(山北)을 제주, 산남(山南)을 양분하여 동쪽에 정의현, 서쪽에 대정현(大靜縣)을 설치하여 통치해오다가 1864년(고종1) 대정, 정의 양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전라도 관찰사 관할하에 두었다. 그 후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1910년(순종4)에는 정의, 대정 양현이 제주군으로 합군되는 동시에 추자면(楸子面)이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분리되어 제주군에 편입되었으며, 한일합방 후인 1915년 도사제(島司制)로 개편, 제주도(濟州道)가 되었고, 1946년 도제(道制) 실시로 전라남도 관할하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현재 2시 2군 6읍 5면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제주 양씨(濟州梁氏)의 시조(始祖)는 <탐라개국설화(耽羅開國說話)>에 나오는
삼신인(三神人) 중의 한 사람인 양을나(梁乙那)이다.
[영주지(瀛州誌)]에 의하면 양을나는 아득한 옛날 제주도 한라산 북쪽기슭 모흥혈(毛興穴:삼성혈이라고도 함)에서 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와 함께 용출(湧出)하여 탐라개국군왕(耽羅開國郡王)이 되었고, 그의 자손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938년(고려 태조28)까지 탐라를 통치해 왔다고 한다.
그후 양을나의 후손 양궁왕자(良宮王子)가 신라(新羅)에 사신으로 에방(禮訪)하니 내물왕(奈勿王:제17대 왕, 재위기간 356-402)이 많은 상을 내리고 성(姓)을 양(梁)으로 하사(下賜)하였다고 하며, 그의 후손 순(洵)이 682년(신문왕2)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후 한라군(漢拏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양을나를 시조로 받들고 관향(貫鄕)을 제주로 삼게 되었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이부시랑(吏部侍郞)과 중추부사를 지낸 진이 상서좌복야로 치사(致仕)했고, 녹사(錄事) 한신(漢臣)의 아들 숙(淑)은 명종(明宗)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한편 지지당(知止堂) 송 흠(宋欽)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던 팽손(彭孫)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소장파 현량(賢良)을 특채, 혁신정치를 실현하려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낙향하였다가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가 실각된 후 복관되어 용담 현령(龍潭縣令)을 지냈다.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한 응정(應鼎)은 팽손의 아들로 공조(工曹)을 거쳐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으며,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고, 효행이 뛰어나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응정의 아우 응태(應台)는 동래 부사(東來府使)를 지냈으며, 응정의 아들 산숙(山璹)은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진주성(晋州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을 따라 남강(南江)에 투신하였고, 그의 처 이씨(李氏)도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목에 칼을 찔러 자살했다.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던 산보(山甫)는 스승이 기묘사회에 화를 입자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로 돌아가 은거(隱居)하며 학문으로 여생을 마쳤으며, 그의 아들 자징(子徵)은 효행(孝行)으로 벼슬에 천거되어 거창(居昌)과 석성 현감(石城縣監)을 역임했고, 장인 김인후(金麟厚)의 「하서집(河西集)」에 행장(行狀)을 썼다. 당대의 석학(碩學) 우계(牛溪) 성 혼(成渾)의 문인(門人)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의 폐모론(廢母論)을 개탄했던 천운(千運)은 감찰(監察)과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를 역임했고, 부호군(副護軍)을 연구했으며,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쌍봉에 살면서 학문에만 전력했다.
한말에 와서는 회일(會一)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화순(和順)과 동복(同福) 등지에서 일본군(日本軍)과 항전하다가 강진(康津)에서 체포되어 단식 7일만에 순국했으며, 한묵(漢默)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하여 「대한매일신보(大旱每日申報)」를 창간, 국민의 항일사상 고취에 앞장섰던 기탁(起鐸)과 함께 제주 양씨(濟州梁氏)의 의맥(義脈)을 살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남한(南韓)에 총 26,699가구, 113,41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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