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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南平) 문(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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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 문씨(南平文氏)

남평은 전라남도 나주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을 통일신라 때 경덕왕이 형웅현으로 고쳐 무주(武州:광주의 옛이름)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조에서는 남평(南平) 또는 영평(永平)으로 불리웠고 그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913년 나주군에 합해져서 지금의 남평면이 되었다. 문씨의 본관은 남평을 비롯하여 단성(丹城)·감천(甘泉:경북 안동지방)·정선(旌善)·강성(江城)·
함평(咸平)·파평(坡平) 등 156본까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감천과 정선을 제외한 관향은 모두가 남평 문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평문씨는 신라 자비왕(慈悲王) 때 사람인 문다성(文多省)을 시조(始祖)로 하여 감천 문씨(甘泉文氏)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고려 태종 때 중국에 건너가 문명을 떨침으로써 문씨의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정선 문씨(旌善文氏)는 본래 전씨(全氏)였으나 시조 문임간(文林幹)이 역시 중국에서 문장으로 명성을 떨쳐 문씨로 사성받고, 돌아와서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태조소부(太子少傅)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나라 문씨의 대종인 남평 문씨의 시조 문다성은 신라말 남평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출생에 대한 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서기 472년(신라 자비왕 15) 전남 나주군 남평현 동쪽에 장자지(長者池)라는 큰 못이 있고 그 못가에는 큰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군주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石函)이 놓여 있었다. 함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었다. 기이하게 생각된 군주가 아이를 거두어 기르니 나이 불과 5세에 문사(文思)에 저절로 통달하고 무략(武略) 이 뛰어날 뿐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문(文)>을 성으로 삼게하고 이름을 <다성(多省)>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후 대장군을 거쳐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으로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남평으로 하게 되었으며 시조의 탄강지인 바위 위에다 <문암(文巖)>이라는 비를 세우고 못가에 장연서원을 지어 매년 음력 9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고려조에서 주로 명성을 떨쳤던 남평 문씨는 중시조 익(翼)이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1098년(숙종 3) 좌·우찬선대부(左右贊善大夫)를 지내고, 급사중(給事中)과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거쳐 우산기상시(右散騎常寺)에 올라 상주국(上柱國)으로 풍산군(楓山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명문의 기초를 다졌다.
당세에 명필로 유명했던 공유(公裕)는 익(翼)의 막내 아들로 예종과 의종조에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묘향산 보현사의 창사 비문(創寺碑文)을 남겼다. 공유의 아들 극겸(克謙)은 문무겸직의 시초를 만든 충직(忠直)한 현상(賢相)으로 이름이 높앗고, 그의 아들이 고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와 판예부사(判禮部事)를 지낸 유필(惟弼)이다.
우리나라 의복혁명의기수 삼우당(三憂堂) 익점(益漸)은 남평 문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는 1329년(고려 충숙왕 16) 강성현 원당리 배양촌(지금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배양리)에서 세칭 청도선생(淸道先生)으로 불리웠던 충정공 숙선(叔宣)의 시작으로 벼슬에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1363년(공민왕 12)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계품사(計 使)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다.
이 때 원나라에서는 공민왕의 배원책(排元策)에 대한 응징문제로 공민왕의 폐위론을 의논하자 이를 극구 반대하다가 원제의 노여움을 받아 교지국(校趾國 :지금의 월남)에 귀양갔다가 돌아올 때 금수품인 목화(木花)씨를 붓대 속에 넣어온 것으로 우리나라 의복의 혁명을 일으켰다. 특히 그는 공민왕 때 우문관 제학(右文館提學)에까지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9년 간이나 두문불출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자 이태조가 친히 불러 벼슬에 등용시키려 하였으나 끝까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으며, 효행이 지극하여 왕명으로 그가 살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효자정각을 세우고 마을 이름을 효자리로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익점의 아들 중용(中庸)·중성(中誠)·중실(中實)·중진(中晋)·중계(中啓)동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간의대부(諫議大夫) 중실의 맏아들 래(萊)는 이 색(李 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성리학을 비롯한 천문·지리·산수·율려(律呂)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던 학자로 목화에서 실을 뽑는 <물레>를 발명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권 율(權 慄)의 휘하로 들어가 역전의 훈공을 세웠던 위세(緯世:익정의 9세손)가 용담 현감(龍潭縣監)을 지내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홍헌(弘獻)은 진주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강물에 투신자살하여 광해군 때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지낸 희성(希聖), 병자호란에 왕을 호종하고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한 재도(載道),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순절한 기호(基浩)와 함께 가통을 이었다.

문씨는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40,419가구, 228,820명, 1975년에는 62,027가구로 집계되었고,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88,932가구, 375,76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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