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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固城) 남(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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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南) 남원(南原) 영양(英陽) 의령(宜聆) 의령(宜寧) 
**固城南氏는 南氏大同譜 16권에들어있습니다.**

영양,의령,고성 남씨(英陽,宜寧,固城南氏)

영양(英陽)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의 고은현(古隱縣)을 신라 말(新羅末)에 영양(英陽) 또는 연양(延陽)이라 하였다가 940년(고려 태조 23) 영양현(英陽縣)으로 개칭하였다. 1018년 예주(禮州)에 속하였다가 명종(明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고, 1413년(조선 태종 13)에 다시 영양으로 고쳐 숙종(肅宗) 때 현(縣)을 두었으며, 남면(南面), 동면(東面), 덕봉(德峰), 수비(首比)를 진보현(眞寶縣)에 청기(靑杞), 석보(石保)는 다시 영해현(寧海縣)으로 예속시켰기다가 1895년(고종 32)에 군(郡)으로 승격될때 활속되었다.

중국(中國)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인 김 충(金 忠)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신라 경덕왕 14)에 안렴사(按廉使)로 일본(日本)에 갔다가 귀로(歸路)에 태풍(颱風)을 만나서 신라(新羅)의 인근 지역인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동죽도(慶北盈德郡丑山面丑山洞竹島)에 표착(漂着)하였다. 그는 신라에서 살기를 원하여 경덕왕(景德王)이 이러한 사실을 당천자(唐天子)에게 알리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당천자는 "십생구사지신(十生九死之臣)을 신례(臣禮)로 부를 수 없으니 소원(所願)대로 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 후 경덕왕은 그가 여남(汝南) 에서 왔다고 하여 <남씨(南氏)>로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민(敏)>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으며, 영양현(英陽縣)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고 후에 영의(英毅)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로 인하여 우리나라 남씨(南氏)가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혀왔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남씨(南氏)의 본관(本貫)은 60여 본(本)이 있는 것으로 기록 되어 었으나 이는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후손들이 전국(全國)에 흩어져, 살고 있는 지명(地名)에 불과하며,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3본이다.
*남 씨(南 氏)는 고려 중엽에 와서 시조(始祖)인 남 민(南 敏)의 후손 3형제가 각각 중시조(中始祖)로 갈라져서 맏형인 홍보(洪輔)가 선조(先祖)의 대(代)를 이어 영양(英陽)에, 둘째 군보(君甫)는 의령(宜寧)에, 막내 광보(匡甫)는 고성(固城)에 정착(定着)하여 살면서 세 계통으로 분관(分貫)하였다.

가문(家門)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첫째 영양 남씨에서 홍보의 손자 숙손(淑孫)이 고려 고종(高宗)과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걸쳐 검교예빈시경(檢校禮賓寺卿)을 지냈고, 숙손의 현손(玄孫) 영번(永蕃)은 신호위 보승중랑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조선(朝鮮) 최고의 역술가로 유명했던 사고(師古)는 이조 좌랑(吏曹佐郞) 희백(希伯)의 아들로 풍수(風水), 천문(天文), 점복, 상법 등에 통달하여 그의 예언은 적중률이 높았다고 한다. 특히 그는 명종(明宗) 말년에 조정의 분당과 임진왜란을 예언했으며, 선조(宣祖)가 잠저(潛邸) 때 사직동(社稷洞)에 있다가 왕위(王位)를 이은 것을 사직동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예언으로 적중시켜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그외 임진왜란 때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로 경주(慶州)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된 의록(義祿)과 경훈(慶薰)의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무공(武功)을 세운 율(慄 : 감찰어사 수의 7세손)과 거창 부사(居昌府使) 노명(老明)은 [남종통기(南宗通記)]를 저술한 제명(濟明), [계 각촬요(溪刻撮要)]의 저자(著者) 공수(公壽)와 함께 가문을 대표했으며, 순천 부사(順天府使)를 역임한 구명(九明)은 숙종(肅宗)이 그의 이름을 대궐 기둥에 적어 모범으로 과시했다고 한다. 남씨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재(人財)를 배출한 의령(宜寧) 계통은 군보(君甫)의 증손 을번(乙蕃), 을진(乙珍), 을경(乙敬) 3형제가 유명했다
고려조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던 을번은 조선개국 후에 입사(入仕)하여 익대보조찬화공신(翊戴補祚贊化功臣)으로 보국숭록대부 문하시중(輔國崇祿大夫門下侍中)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재(在)는 초명(初名)이 겸(謙)이었으나 공신(功臣)으로 봉해지는 것을 사면하려고 지방(地方)으로 피신하자 태조(太祖)가 그를 찾으려고 무척 애쓴 끝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와 이름을 재(在)로 사명(賜名)했 다고 하며, 임금이 내려준 이름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자(字)를 경지(敬之)라 했다 한다. 특히 그는 술을 좋아하고 도량이 컸으며 정승반열에 있으면서도 정사(政事)에는 항상 비판적이었다. 그가 손님이 오면 바둑두기를 좋아하여 그 까닭을 물으니 "산 사람은 기운이 있으므로 반드시 말을 하게 되고, 말을 하게 되면 조정의 일에 말을 비치지 않기가 어렵기 때문에 바둑을 두면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말을 피할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아우 은(誾)은 성품이 호기롭고 뛰어나 어릴때부터 기묘한 계책을 좋아하였다. 우왕(禑王) 때 사직단직(社稷壇直)으로 있었던 그는 왜적이 침입해오자 자청하여 지군사(知郡事 : 군수)로 나가 기병(騎兵) 10여 명으로 대파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을번의 아우 을진(乙珍)은 고려의 국운 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사천(沙川 :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하패리)으로 은거(隱居)하여 조선이 개국된 후 수차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의 절의에 감복한 태조가 사천백(沙川伯)에 봉하자 더 깊숙히 감악산(紺嶽山)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며 일생을 마치니 세상 사람들은 그가 거처한 자리를 남선굴(南仙窟)이라 불렀다. 을진의 후손에 서는 곡산군수(谷山郡守)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치신(致信 : 을진의 손자)의 아들 포(褒)와 곤(袞)이 유명했다.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청맹(靑盲)으로 행세하며 벼슬을 버리고 적성(積城)의 감악산(紺嶽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던 포 는 항상 무명베갓에 떨어진 옷을 입고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스스로 창랑거사(滄浪居士) 또는 소요자(逍遙子)라 일컬었고 가는 곳마다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세상에서는 그의 얼굴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고 [연려실기술]에 전한다. 그가 병이 나서 감파동(紺波洞) 재사(齋舍)로 돌아와 아들 정진에게 경계하며 말하기를 "네가 여덟 번 고을 벼슬을 제수받아 세 번을 사양하고 다섯 번을 나간 것은 노부모가 있으므로 뜻을 굽힌 것이나 우리집에는 선대의 토지와 집이 있어 족히 바람과 비를 가릴만하고 토지는 죽이나 밥을 이어 먹을 만하니 나 죽은 뒤로는 다시 벼슬에 나갈 생각은 말라"고 하였다. 태종(太宗)의 넷째 딸 정선공주(貞善公主)와 혼인하여 부마(駙馬)가 되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진 휘(暉)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도승지(都承旨) 조서로(趙瑞老)의 친족간음(親族姦淫)을 탄핵했던 지(智)는 재(在)의 손자로서 이들의 후손에서 많은 인재(人財)가 배출되어 가문(家門)을 크게 일으켰다. 휘(暉)의 손자(孫子)로 명장(名將)의 웅지(雄志)를 펴보지도 못하고 비명의 죽음에 그쳤는 이(怡)는 태종(太宗)의 외손(外孫)이며 좌의정(左議政) 권 남의 사위로 17세 때 무과(武科)에 장원하고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서북방으로 건주위(建州衛 : 남만주 지역에 살던 여진족의 하나)를 토평하여 27세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랐으나 역모를 꾸몄다는 류자광(柳子光)의 모함으로 예종(睿宗) 즉위년에 주살(誅殺)되어 시기와 질투로 점철된 조선의 역사속에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아까운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그외 지(智)의 증손으로 성종(成宗)의 부마(駙馬)였던 섭원(燮元 : 성종의 딸 취정옹주와 혼인하여 선천위에 봉해짐)과 치원(致元 : 성종의 딸 경순옹주와 혼인하여 선성위에 봉해짐)이 유명했고, 목사(牧使) 치욱의 아들 언경(彦經)은 서경덕(徐慶德)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한 수(韓 脩)와 더불어 조선조(朝鮮朝) 경학(經學)의 쌍벽으로 일컬어졌으며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거쳐 양근(楊根) 영천동(靈川洞)으로 돌아와 67세로 세상을 마쳤다.
조선 세조(世祖) 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효온(孝溫)은 사림(士 林)의 추앙받는 인물(人物)로 세조에게 물가에 이장된 소릉(昭陵 : 단종 모 현덕왕후의 능)의 복위를 상소했으나 도승지(都承旨) 임사홍(任士洪)과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저지로 상달되지 못하자 이로부터 세상을 등지고 유랑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그가 만년에 [육신전(六臣傳)]을 지었는데 그의 문인(門人)들이 화(禍)가 두려워 말리자 "어찌 죽기를 두려워 대현 (大賢)의 이름을 영원히 잃게 할 수 있으리오 "하며 야사(野史)로 완성했으나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숙종 때 비로소 간행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선조(宣祖) 때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이웅(以雄 : 참판 응운의 손자)과 인조조에서 대사헌(大司憲)과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이흥(以興)이 뛰어났으며, 숙종조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던 이성(二星 : 현감 식의 아들)과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내고 문장(文章)과 글씨에 뛰어났던 용익(龍翼)은 약천(藥泉) 구만(九萬)과 함께 조선말에 가문을 빛낸 인물이다. 1629년(인조 7) 현령(縣令) 일성(一星)의 아들로 태어난 구만은 효종(孝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문장과 서화로 이름을 떨쳤고, 숙종조에 소론(小論)의 영수가 되어 대제학(大提學)과 영의정을 지내며 당파싸움이 격렬했던 당시 정계(政界)를 주름잡은 명신(名臣)이었다.
대제학 용익의 증손 유용(有容)은 영조(英祖)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과 예조 참판을 지냈으며, 1764년(영조 40) 우빈객(右賓客)이 되어 치사(致仕)한 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그의 아들 공철(公轍)은 좌,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당세의 명문장가로 손꼽혔다.
고성(固城) 계통의 인맥(人脈)으로는 고려에서 은청광록대부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지낸 도정(途庭 : 광보의 증손)과 7 세손 금(琴)이 뛰어났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기(奇)의 아들로 태어난 금은 조선조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5형제 중 넷째 수문(秀文)은 세종 때 최초로 호당(湖堂)에 뽑힌 인물이다. 금의 손자 세주(世周)는 연산군의 황음(荒淫 : 함부로 음 탕한 짓을 함)을 직간(直諫)하다가 화(禍)를 입었고, 계신(繼身)의 아들 추는 중종(中宗) 때 장원급제하여 글재주로 명성이 높았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삼계(森溪)로 물러가 시작(詩作)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외 임진왜란 창의(倡義)하여 선무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던 수일(守一)과 정난공신(靖亂功臣)에 책록되었던 치공(致恭)이 대표적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 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씨는 남한에 총 53,011 가구, 222,246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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