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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永川) 황보(皇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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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黃州) 
영천 황보씨(永川皇甫氏)

영천은 경상북도 남동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우너래 고대 골벌국이었던 것을 신라 초기에 영천군 일원은 절야화군, 신녕지방은 사정화군이라 하였다. 경덕왕 이후에는 임고군·면백현·이지현 등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초에는 도동·임천현을 합하여 영주군이라고 불렀으며 성종 때에는 자사를 두었다. 현종 때에는 신녕현이 경주로 편입되고 명종 때에는 감무를 두었다가 그 뒤 지주사 소재지로 승격되었다. 1414년(태종 14) 영천군으로 개칭되고 1497년(연산군 3) 신녕현이 폐현되면서 영천군에 귀속되었다. 그 후 1937년 영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81년에는 영천읍이 시로 분리승격하였다. 황보씨는 중국 안정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신라 말에 당나라로 부터 귀화한 황보 경(皇甫 鏡)이 우리나라 황보씨의 시원을 이룬 것으로 전한다. 「영천황보씨세보」에 의하면 황보 경(皇甫 鏡)의 증손 능장(能長)이 고려 태조 때 금강성 장군으로 나라에 공을 세워 영천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관향을 영천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영천 홍보씨는 특히 고려조와 조선 초기에 걸쳐 많은 명신을 배출하여 세도가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명종 때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친 항(抗)과 대사성을 지낸 탁(倬)이 유명했으며, 정종 때 참지정사·평장사를 지낸 영(穎)과 고종 때 좌복야·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른 기(琦) 등이 뛰어난 인물이다. 한편 유의(兪義)는 고려 현종이 즉위하는데 공헌했으며 1031년(현종 22) 중추사를 거쳐 이부 상서와 참지정사를 지냈고 덕종 때는 문하평장사에 올랐다.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을 토평하고 일등공신에 오른 임은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 때 부원수로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가담하여 일등공신에 오르고 삼도 도체찰사가 되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 지중추원사에 올랐다. 임의 아들 인(仁)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 때 장령과 병조 판서를 거쳐 평안·함길도 체찰사가 되어 10년 동안 김종서 장군과 함께 육진을 개척하였다. 그는 태종·세종·문종 3대에 걸쳐 도승지를 비롯하여 관찰사·좌찬성·우좌의정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여 조정의 중신이 되었으며, 1452년(문종 2) 영의정이 되어 어린 단종을 보필하다고 계유정난 때 김종서(金宗瑞)·정 분(鄭 ) 등과 함께 수양대군에게 살해당했다. 이때 그의 두 아들 참판을 지낸 석(錫)·직장(直長)을 지낸 흠(欽)과 소자 원(源)·문(汶) 등 다섯 사람이 화를 당하니 영천 황보씨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그 후로 나머지 일족들은 뿔뿔히 흩어지거나 붙잡혀 섬이나 먼 변방의 관리나 천민이 되기도 하였으며, 성을 바꾸며 숨어 살기도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천 황보씨는 남한에 총 2,071가구, 8,37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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