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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晉陽) 하(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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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江華) 진주(晉州)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ㆍ신희옹(新稀翁), 본관은진양(晉陽) 이다.부윤 하자종(河自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정우(鄭寓)의 딸이다. 하연 선생은 진주 이구산(尼丘山) 아래 여사촌(餘沙村, 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에서 출생했다.포은 정몽주의 제자다. 선생은 태조 5년(1396) 21세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봉상시 녹사(奉常寺錄事)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 의금부 부진무(義禁府副鎭撫) · 예조 참판(禮曹參判) 등의 관직 을 거쳐 세종 31년(1449)에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여 왕의 비리나 다른 신료의 잘못은 반드시 비판하여야 직 성이 풀리는 성미 였다. 이 때문에 신하들의 언론활동을 그다지 달갑지 않게 여기던 태종과는 많은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특히 태종 14년(1414) 이후 이른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가 시행되면서 언론의 자유 가 극히 위축되자 그는“간신(諫臣)으로서 대신(大臣)의 잘못을 논핵 했다가 죄를 얻게 되면 언로(言路)가 막히고 임금은 고립되게 됩니다”라고 하여 극력 비판하였다. 태종 16년(1416)에 는 평안도(平安道) 안주(安州)의 지방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직접 현지에 내려가 이를 조사했고 다음 해에는개국공신 이숙번(李叔蕃)의 사사로운 비리를 엄중히 탄핵하여 그의 가산(家産)을 적몰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우대언(右代言)을 거쳐 세종이 즉위하자 지신사(知申事)에 임명되었고 세종 5년(1423)에는 당시 사찰들의 토지를 정리할 것과 교단을 정비할 것을 청하였다.

1445년에 좌찬성에 오르고 연달아 삼정승을 역임하였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면서도 간소하여 풍채가 단아하였다. 새벽에 닭이 울면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대궐을 향해 바로 앉았다고 한다. 시재(詩才)가 뛰어나 그에게 시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붓을잡고 쓰니 시상(詩想)이나 필법이 늙을수록 절묘하였고 사대부들에게 예법으로 대우하여 문전에 손님이 끊이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오랜 동안 이조(吏曹)를 맡았으나 사사로 운 청탁을 좋아하지 안았고, 정승(政丞)이 되었을 때도 법을 좇아 흔들리지 아니하여 시종 여일하게 근신하였으니 그를 ‘태평시대의 문치를 이룩한 재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48세가 되던 해(1423)에는 대사헌으로 조계종 등 불교 7종파를 선(禪)ㆍ 교(敎)의 양종(兩宗)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하고자 하여 채택받았다. 2년 뒤(1425)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예조참판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 겸 평양부윤에 임명되었으나파직되어 천안 으로 귀양갔다. 이듬해에 풀려나와 54세에 병조참판에 임명되었고, 66세에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시묘를 하였다. 68세에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로서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나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그 뒤 형조판서ㆍ좌참찬을 지내고, 의정부에 들어가서는 판이조판서로서 이조의 일을 맡아 보았다.70세에 좌찬성이 되어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곧 우의정ㆍ좌의정이 되었고,74세에 영의정에 올랐다. 2년뒤(1451)에 문종이 대자암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2년 뒤(1453) 8월 15일에 향년 78세로 별세하였다.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 년간 문안에 사알(私謁, 사사로운 일로 윗 사람을 뵘)을 들이지 않았으며 법을 잘 지켜승평수문 (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단종 2년(1454)에 세자사부(世子師傅)의 옛 은혜로 문종(文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세조 9년(1463)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충효문(忠孝門)을 세웠다. 이어 세조 13 년(1467)에 영당(影堂)을 세웠는데, 그 뒤 선조 41년(1608)에 영당을 합천의 야로(冶爐)에 옮겨 세웠다.

광해군 7년 (1615)에 타진당(妥眞堂)이 사액되었고 인조 2년(1624)에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이 건립되었다. 또 숙종 34년(1708)에 문의(文義)의 우록서원(友鹿書院) 이 건립되고, 숙종 44년(1718)에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이 건립되었다. 그 뒤에도 정조 10년(1786)에 장연의 반곡서원(盤谷書院)이, 순종조에 무주의 백산서원(柏産書院)이 건립되 었다. 선생은 성품이 간결하였으며 부모 를 효성으로 섬기고 일족과 인(仁)으로 화목하였으며 친구를 버리지 안고 경조(慶弔)를 빠트리지 않았다. 글읽기와 시읊기를 좋아하였으며 가산(家 産)에 힘쓰지 않고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집안에선 화목하고 관아에서의 일처리 에는 밝게 살피기에 힘썼다 양친이 함께 연세가 팔십이었는데 마음으로 좋아하는 모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한 구경당(具慶堂)을 지어 세시(歲時)와 복일(伏日) 납일(臘日)에는 반드시 잔치를 열어 장수를 빌었다. 이에 남 들이 모두 영화롭게 여겼으며 그 일을 노래지어 부르기에 이르렀다. 부모가 별세하자 출입할 때는 반드시 사당에 고하였다. 또한 구경당은 부모가 거처하던 곳이므로 해마다 지붕을 수리하며 명칭을 고쳐 영모당(永慕堂)이라 하였다.

이에 자질(子姪)들이 기와로 고쳐 얹을 것을 청하니 하연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부모가 거처하시던 곳을 어찌 바꿀수 있겠느냐? 또한 나의 후세로 하여금 선대의 검소함을 법삼게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묘당(廟堂)에 있은지 전후 이십년 동안 사대부를 예의로 접하였으며, 집으로 찾아오 는 개인적인 방문은 받지 않았다. 또한 시종토록 조심스러웠으며 법 집행에 흔들리지 않았으니 승평한시대의 수문(守文)재상이라 할 만하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니 "학문에 힘쓰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이 문(文)이고, 자상하고 부모 를 아끼는 것이 효(孝)이다" 하였다.

증조는 중대광보국숭록대부 진천부원군(晋川府院君) 송헌(松軒) 하즙(河楫)인데시호는 원정공(元正公)이다. 조부는 중대광부국숭록대부 진산부원군(晋川府院君) 고헌(苦軒)하윤원(河允源)이다.부친 목옹 하자종은 고려에 벼슬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고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이성계의 끈질긴 회유를 뿌리치고 두문동 칠십이현(七十二賢)에 동참하였으나 뒤에 아들의 귀현으로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되셨다. 경재 선생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천자와 기운이 수려하고 당당하였으며 배우기를 좋아하셨다.

6세 이후로는 부친 목옹이 주로 외직으로 있었으므로 그의 임지(任地)를 따라 각 지방으로 옮겨다니며 생활하셨다.13세가 되던 1388년 때에 부친을 따라 야은(冶隱) 길재를 대면하고 불사이군의 의리에 대하여 이때까지 경재가 배운바를 설명하자 야은(冶隱) 은 이 아이가 우리들 기성세대가 지켜야 할 지도자의 덕목(德目)을 올바로 지적했다고 대견하게 여긴바 있다. 14세 때 부터 포은(圃隱) 정몽주의 문화에 들어가 수학하였다.경제는 본래 학문의 좋아하는 데다가 포은 같은 훌륭한 스승을 만났으니 더욱 학문에 힘을 쏟아 성리학(性理學)에 사구(思究)가 깊었다.스승의 가르침이 남달라 경재는 포은을 친부모와 같이 따랐으며 정동골 육친(精同骨肉親)이라표 현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으나 4년 뒤에 포은이 비명횡사 하니 경재의 슬픔은 크고 애통한 것이었다.

경재는 19세 되던 해인 1394년에 성주이씨(星州李氏) 존성(存性)의 넷째 따님과 결혼하니 원정공(元正公)의 외손자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과 동서간이되었다. 21세 되던 해의 봄에 생원(生員)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여름에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다음해에 봉상시(奉常寺)의 봉사(奉事)로 공직에 첫 출발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예문관(禮文館), 사헌부(司憲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승정원(承政院) 및 육조(六曺) 의 요직과 두차례의 고을원과 네 차례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한 바 있었다.

1419년에는 조선건국 이후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열었는데 경재 선생이 44세의 나이로 이 경연의 참찬관(參贊官)으로 발탁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는 경재의 학문과 경륜 을 높이 산 증좌라 할 것이다.경재 선생은 나이 45세 때인 1420년에 예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중국 가는 사신(使臣)으로 선발되 었는데, 당시 대국의 사신으로 뽑히려면 학문과 시문에 밝고 식견, 언변, 기지,담력 등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자질 이 있는 인물을 선발하였으니 선생의 뛰어난 자질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할것이다.

1423년 경재 48세 때에 는 세종 임금에게 척불소(斥佛疎)를 올려 조선의 개국 이념인 숭유 배불 정책을 강화해 나가도록 권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힘썼다.1425년 50세 때에 경상도 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재직할 때 세종 임금의 명을 받들어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를 편찬한 바 있는데 현재에 이르러 다른 도의 지리지는 다 없어졌으나 오직 경상도 지리지만 보존되고 있다,이것은 현존의 최고(最古)의 조선시대의 지리(地理誌)이다.1430년 형조판서(刑曺判書)로 재직하실 때에 왕명(王命)에 의하여 정승 허조(許稠)와 함께 유교국가의 예제(禮制)의 기본골격인 국조오례 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한 바 있다.

선생은 56세 때인 세종13년 1431년 2월 1일에 예문관(禮文館) 대제학(大提學)에 제수(除授) 되는 영광을 얻었다.대제학을 문형(文衡)이라고도 하는데 한 집안에서 문형에 올랐다 하면 정승 판서보다도 더 귀하게 여겼던 것이 조선시 대의 관례였다. 대제학은 누구를 막론하고 학문과 문장이 심오 하고 전아함을 인정 받았음은 물론이다.1437년 62세 때에 이조판서(吏曺判書)로 재직하면서 조선의 세제(稅制)를 만들어 우선 영남과 호남에 실시하여 납세를 현실에 맞게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게 하는 데 주력 하였다.1445년 연세 70세에 우의정이 되시니 비로소 상신(相臣)의 반열에 올랐다. 72세 때에는 좌의정(左議政)으로 영전되고 1449년 74세 때에 영의정(領義政)에 올랐다.

그 뒤 조선 5대 임금 문종이 즉위하여 이미 낡은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 하자 선생은 이단(異端)을 숭상해서는 안된다고 굳게 간언(諫言)하니 문종은 과거 세자때의 스승인 노신(老臣)의 진언을 가납하여 대자암 중수를 중지한 일화는 유명하다.경재 하연(敬齋 河演) 선생은 말단 공직으로 부터 출사(出仕)하여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인 영의정(領義政)의 자리에까지 를 오르면서 근검(勤儉) 청백(淸白)의 정신으로 정진하여 나라 발전에 큰 족적 을 남기고 문종원년 1451년 76세의 연세로 퇴임하게 된다. 퇴임하시던 그 해에 우리 하씨(河氏)의 족보인 경태(신미)보 를 간행하시니 우리 나라 족보 문화의 효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나 아깝게도 후손이 불민하여 그 원본을 보존 전수치 못하고 서문만이 진양지(晋陽誌)에 소개되고 있을 따름이다.오하(吾河)의 경태보(景泰譜)보다 25년이나 늦게 간행된 안동권문(安東權門)의 성화보(成化譜)가 우리 나라 족보의 효시라 하여 규장각 도서관에 소장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경재 선생은 1453년 8월 15일 향년78세를 일기로 많은 업적을 남기고 별세하시니 단종임금 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면서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1454년 단종 2년에 문효(文孝)라는 시호가 내리고 문종의 묘정에 배향 되셨다. 좌의정 남지(南智)선생이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짓고 1463년 세조 9년에 강희맹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경재(敬齎) 하연(河演) 선생은 태평성대인 태조 시대인 21세 때에 관직에 입문하여 76세에 영의정(領義政)의 벼슬을 물러날 때까지 무려 53년 동안 나라경영에 혼신의 심혈을 기울여 봉사하였으며,선생은 조선 개국 이후 400여년 동안 청백리157분 중에 한분이시며 조선의 초창기 국법 질서와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지대한 공로를 남김으로써, 평화시대의 공복으로써 위대한 사표(師表)를 남기셨다.

편서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와『진양연고 (晋陽聯藁)』가 있으며, 저서에 『경재집(敬齋集)』이 있다. 부인은 성주 이씨로 개성부윤(開城府尹) 이존성(李存性)의 딸로 선생과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 었고, 묘는 시흥시 신천동 산 12 소래산 아래에 있는데, 무공단좌형(武公端坐形)의 명당으 로 알려지고 있다. 신도비는 1940년에 건립한 것으로묘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미터에 있는데, 두 번째 신도비는 1994년에 건립하였는데, 비명은 이가원(李家源)이 지었다. 묘는 1986년 3월 3일에 향토유적제3호로 지정되었다.1995년에 선생의 후손인 진양하씨 문효공 파중앙 종친회에 의해 선생의 묘 아래에 소산서원이 신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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