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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川皮氏始祖 皮謂宗
  • 올린이 : 김연구원 ( 2021.09.20 08:49 ; From : 115.136.113.8 )
  • 조회 : 357 회
  • 洪川皮氏始祖 皮謂宗 金吾衛上將軍
    定宗朝에 東國按廉使로 高麗에 왔다가 歸化하여 兵部侍郞을 지내고, 左司議大夫로 追贈되었다. 그의 長男 皮寅善 政堂文學, 左僕射 洪川君에 봉해졌다
    피씨는 중국 천수(天水)에서 계출된 성씨이다. 周나라 경사인 樊仲皮라는 사람이 공명이 있어 이름 마지막 글자인 피자를 따서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진나라 효제 때 피초(皮初)라는 사람이 위문장을 지냈다고 하며, 당나라 태상박사(太常博士) 피일휴(皮日休)와 그의 두 아들 피중업, 피광업이 문명을 떨쳤다.
    피위종의 장남 피인선(皮寅善)이 정당문학(政堂文學), 좌복야(左僕射) 등을 역임하고 홍천군(洪川君)에 봉해졌다.
    피위종의 차남 피인고(皮寅古)는 대상(大相),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단산군(丹山君)에 봉해지면서 단양 피씨로 분적하였다

    洪川皮氏人物
    피인선의 아들 피맹문은 승지를 지냈고, 손자 피원휴는 한림학사(정4품)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으며, 고려 말에 용담 현령을 역임한 피원량은 재임 기간 동안 왜구 방비에 공헌하여 크게 이름을 날렸다. 조선 헌종 때 학자로 유명한 피병추는 학문이 깊고 문장에 뛰어나 명망이 높았다
    피인선(皮寅善) : 고려 때 좌복야
    피인고(皮寅古) : 고려 때 평장사
    피맹문(皮孟文) : 고려 때 승지
    피맹인(皮孟仁) : 고려 때 직학사
    피원휴(皮元休) : 고려 때 한림학사
    피자휴(皮子休) : 1390년(고려 공양왕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사주부(宗簿寺主簿)를 거쳐 상서(尙書)에 이르렀는데, 박학하고 시문(詩文)에 능했다. 조선조에 광주 교수관(廣州敎授官)을 역임했다.
    피원량(皮元亮) : 고려 말 용담현령(龍潭縣令)
    피재구(皮栽九) : 조선 때 참의
    피영기(皮永基) : 조선 때 사성
    피연길(皮然吉) : 조선 때 참의
    피세숙(皮世塾) : 조선 때 한성판윤
    피병준(皮秉俊) : 조선 말기 의관. 약방내침의, 군무아문주사

    現代 人物
    피천득(皮千得) : 서울대학교 교수, 수필가
    피수영(皮守英)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 미네소타 대학교 외과대학 소아과 교수, 서울아산병원 소아과 과장,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 교수
    피서영(皮瑞英) :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출신, 보스턴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科擧 及第者
    홍천 피씨는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50명을 배출

    문과
    피자휴(皮子休)

    무과
    피덕린(皮德麟) 피상린(皮祥麟) 피익황(皮益煌) 피종후(皮宗厚) 피태성(皮泰成) 피홍신(皮弘紳) 피홍철(皮弘喆)

    역과
    피교선(皮敎宣) 피득충(皮得忠) 피득침(皮得忱) 피문회(皮文會) 피상경(皮尙絅) 피상룡(皮相龍) 피상묵(皮相默) 피상현(皮尙顯) 피의휴(皮義休) 피재희(皮載禧) 피진문(皮振門)

    음양과
    피경후(皮景厚) 피병간(皮秉侃) 피병년(皮秉年) 피병순(皮秉淳) 피병헌(皮秉憲) 피상오(皮尙五) 피상요(皮相堯) 피상인(皮尙仁) 피익경(皮益烱) 피재유(皮載裕) 피종선(皮宗善) 피종섬(皮宗暹)

    의과
    피병관(皮秉觀) 피병룡(皮秉龍) 피병연(皮秉淵) 피병준(皮秉俊) 피병집(皮秉緝) 피상국(皮相國) 피상옥(皮相玉) 피상익(皮相翊) 피상협(皮相協) 피재겸(皮載謙) 피재풍(皮載豊) 피종식(皮宗植) 피종우(皮宗佑) 피종환(皮宗桓) 피홍근(皮弘根) 피희경(皮熙敬) 피희두(皮熙斗) 피희석(皮熙晳) 피희성(皮熙成) 피희철(皮熙哲)

    생원시
    피맹인(皮孟靭)

    丹陽皮氏始祖 皮寅古
    피위종의 차남 皮寅古가 고려시대에 大相, 平章事를 지내고 丹山君에 봉해지면서 홍천 피씨에서 분적했다.

    官職에 오른 主要人物
    皮孟仁 直學士,
    皮元休 翰林學士,
    皮子休 尙書,
    皮元亮 縣監,
    皮栽九 參議,
    皮永基 司成
    皮然吉 參議
    皮世塾 漢城判尹
    皮秉樞 學者
    皮子休 宗簿寺注簿,尙書
    皮元亮 高麗末 淳昌縣令 倭寇를 防備하는데 힘썼다.
    皮秉樞 朝鮮憲宗때 學者

    皮子休 : 高麗後期 文臣. 高麗恭讓王 2년(1390년) 庚午庚午榜 丙科 文科及第 尙書
    皮元亮 : 高麗後期 官僚. 高麗末 淳昌縣令으로 在職할때 倭寇 侵略하자 廉君利, 高允德 등과 謀議, 淳昌縣의 남쪽 울타리에 돌사다리를 세우고 높이 올라가 여섯곳에 돌을 쌓았으며, 그곳에서 倭寇의 動靜을 살피며 돌을 떨어뜨려 粉碎하고자 하였다. 倭寇는 對備가 徹底함을 알고 감히 接近하지 못했다.


    槐山皮氏始祖 皮慶庭

    피씨의 기원은 중국 주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 卿士인 樊仲皮의 피자를 따서 姓으로 삼았으니 실로 역사가 오랜 성씨라 할만하다.

    槐山皮氏系譜
    鎭川郡誌에 따르면, 槐山皮氏는 高麗忠烈王때 元나라에서 高麗에 按廉使로 왔다가 歸化한 皮謂宗 洪川君을 始祖로 하며,
    『丁未譜』에는 金紫光祿大夫 金紫光祿大夫神慶衛大將으로 恭愍王 때 高麗에 亡命한 皮慶延을 王이 槐山君으로 봉하면서 그곳을 貫鄕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또 皮慶延의 5世孫으로 朝鮮開國에 功을 세우고 兵曹判書와 全羅監司를 지낸 皮得昌,

    한국의 피씨 시조도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것이 성씨관련 문헌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괴산피씨의 경우, 시조 皮慶庭은 중국 원나라 사람으로 초휘는 起光이고 호는 청파라고 알려져 있다. 원나라 순제 때 금자광록대부 신경위 대장으로 남월을 정벌하다 실패하자 가족을 이끌고 우리나라로 망명한 사람이다.

    망명한 피경정이 공민왕의 고려 조정에서 괴산군에 봉해지는 등 특별대우를 받은 것이 계기가 돼 이후 괴산피씨 본관이 생겨났다. 괴산피씨를 중흥시킨 인물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병조판서와 전라감사 등을 지낸 피득창(皮得昌)이다.

    그는 이부상서 피성무(皮成茂)의 아들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 과정에서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된 인물이다. 그래서 괴산피씨의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성씨 총감’에 따르면 “원래 洪川皮氏였는데, 괴산에 정착하여 세거하면서 후손들이 괴산을 본관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고 하는데, 이 역시 피득창과 관련이 있는 얘기다.

    괴산은 충청북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괴산이라는 지명을 쓰게 된 것은 조선 태종 13년(1413) 때였다. 고구려시대에 仍斤內郡이라 하였으며, 신라시대에는 괴양군, 고려시대에는 괴주군으로 불렸다가 조선 태종조에서 괴산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충주에 예속시켜 감무관(監務官)을 두어 다스리게 한 적이 있고, 1895년(고종32)에 충주부에 속했다가 1914년 부·군 통폐합시 연풍군을 병합하였다.
    괴산피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皮世萬을 들수 있다. 그는 숙종때 적상별장을 거쳐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 영조조 정희량의 난이 일어나자 병방군 류만원 등과 더불어 적을 토평, 많은 공을 세우고 순절했다. 병절교위 훈련원 첨정·부사과에 추증되고, 성산(성주)에 紀功碑가 세워졌으며, 그 사적이 ‘忠義孝烈錄에 실려 있다.

    그 외 중시조 득창의 아들 康芝가 장령을 지냈으며, 손자 釘이 진사를, 증손 燒는 목사를 역임하여 판서에 오른 후손 홍군, 통덕랑 경송, 방어사 동현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그 외 통정대부 종남과 판관 세만, 통사랑 세담이 유명했으며, 효자로 향민의 칭송을 받은 운손, 통덕랑 경우, 참봉 봉준 등이 가문을 빛낸 후손들이다.


    괴산피씨는 시조로부터 약 65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후손이 번창하여 29세에 이르고 있고 충청도의 충주와 진천, 경북의 상주와 성주, 안동, 경주 등 괴산지역으로부터 외곽으로 세거지를 넓혀가며 오늘에 이르렀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의하면 괴산피씨는 전국에 총 693가구 220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홍천피씨는 원나라에서 금오위상장군을 지낸 원나라 피위종을 시조로 하고 있다. 고려 충렬왕때 동국안렴사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풍물에 정이 들어 귀화하게 되었는데, 충렬왕이 병부시랑을 제수하였고 뒤에 좌사의대부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맏아들 인선이 정당문학, 좌복야 등을 지낸 후 홍천군에 봉해졌으므로 홍천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홍천은 고구려의 벌력천현인데, 신라 때는 녹효로 고쳐 삭주의 영현이 되었다가 1018년에 홍천이라 개칭하고 삭주에 예속시켰으며 1143년에 감무를 두었다. 1413년 홍천현, 1895년 춘천부 홍천군, 1896년 13도제 실시로 홍천군이 되었다.

    안산피씨의 중시조는 정당문학 좌복야를 지낸 피인선이다. ‘성씨 총감’에 의하면 피인선이 안산군에 봉해짐으로써 안산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피인선의 시호는 문평. 그 후손 중에서 피우세가 충무위부사과를 지내고 일산 거구동에 세거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성씨총감 등 성씨관련 문헌기록에 의하면 홍천피씨 외의 몇몇 본관의 피씨도 원래는 홍천피씨였다고 밝히는 기록이 나타난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32개 피씨 본관으로 분파하였다가 현재 10여개 본관으로 통합, 사멸되는 과정이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지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홍천피씨의 인구는 1143명으로 괴산피씨에 이어 피씨 중에서 두 번째로 많다.

    역사속의 피씨 인물

    고려시대·조선조에 관직 중용 많아
    18세손 피세만 ‘종4품’ 벼슬하사

    우리 역사에서 피씨의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다. 수많은 역사 현장에 이름을 올린 인물 중에서 쉽게 기억되는 인물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괴산피씨 홍천피씨 등 피씨 시조가 원나라 때 중국에서 왔고, 고려에 정착한지 오래지 않아 조선이 개국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럼에도 고려시대와 조선조에서 관직에 중용된 피씨 인물은 많이 발견된다. 우선 괴산피씨 시조 괴산군 피경정, 이부상서 이성무, 괴산피씨 중시조 병조판서 피득창, 영조때 큰 공을 세운 괴산피씨 18세손인 피세만 등이 있다.

    피세만은 공신 147명 중에 등재되어 종4품관인 훈련원 검정 벼슬을 하사 받았으며 그 공훈과 공적 내용이 기린각에 기록되어 있고 기공비가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에 세워져 있다. 매년 5월이면 전국에 산거하고 있는 피씨후손들이 정성으로 예를 갖추어 성주 용암 회목 始祖祭壇碑를 찾아 향사하고 있다.


    홍천피씨의 시조 피위종은 고려 충렬왕 때 병부시랑을 제수 받았고, 그 아들 피인선은 정당문학, 좌복야 등을 지내고 홍천군에 봉해졌다. 피인선의 아들 피맹문은 승지, 손자 피원휴는 한림학사를 지냈다. 조선조 성균관 사성을 지낸 피영기, 참의 피연기, 한성부 판윤을 지낸 피세숙 등이 관직에 올랐다.
    안산피씨는 의감을 지낸 피현주, 한성부 좌윤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피연성, 중시조 충무위 부사과 피우세, 감목관 피재길 등이 있다.

    현대의 피씨 인물
    재·정·교육계 등 왕성한 활동

    현대에 가장 크게 이름을 날린 인물로 금아 피천득을 꼽을 수 있다. 5월 25일 97세를 일기로 타계한 금아 피천득(琴兒 皮千得)은 서울대 명예교수, 수필가, 시인, 영문학자다. 수필하면 ‘인연’을 떠올릴 만큼 명작을 남겼다. 또 ‘플루트플레이어’ ‘내가 사랑하는 생활’ 등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기업인으로는 피홍배(71)회장을 들 수 있다. 피홍배 회장은 현재 주식회사 삼정 외 몇 개 회사의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는 중견 기업인이다. 경북 성주가 고향인 피회장은 현재 재경 성주향우회 명예회장, 성주신문 회장, 재경 성주기독신우회 회장, 재경 성주복지장학회 등 여러 단체에서 왕성한 활동으로 고향 발전과 고향의 후학들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기업에서 얻어진 소득의 사회 환원을 실천하고 있으며, 괴산, 단양, 홍천, 경주 등 전국 피씨 총대종회장을 20여년 맡았다.


    피씨는 종원 관리에 철저하여 고위관직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공직에 나가는 경우 청렴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마라’ ‘남에게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되지마라’ ‘부정축재 하지마라’ ‘봉사하는 마음을 가져라’ 등 가정교육에서부터 철저한 종원교육을 하고 있는 것.


    전체 인구가 6000여명에 불과하지만 학계와 재계, 법조인 등 각 분야에서 두드러진 인물들이 고루 분포하고 있다.(지면 사정 및 본관별 형평성 등의 이유로 현대인물 명단 생략)


    피씨 주요 파조(派祖)와 전국의 세거지

    단양·괴산·홍천·경주·상주 등 많이 거주
    성주 회목 30여호 집성촌엔 재실 자인당

    19세 목사공파 피광종의 후는 대구 매천동을 중심으로 살고 있고, 사직공파 피수덕의 후는 경북 상주시 외답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18세 첨정공파 피세만의 후는 경북 성주군 용암면 본리3동(회목)을 중심으로 살고 있고, 판관공파 피만득의 후는 경북 상주시 엄암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17세 좌윤공파 피우백의 후는 경북 성주군 용암면 기성리를 중심으로 살고 있고, 참의공파 피순길의 후는 충북 진천군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감정공파 피정현의 후는 경북 상주시 외답과 청리를 중심으로 살고 있다.


    16세 통덕랑공파 피학빈의 후는 충북 진천군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14세 통정공파 피한경의 후는 충북 충주시 한수를 중심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13세 도총관공파 피동책의 후는 경북 경주시를 중심으로 살고 있다.


    성주(星州)로의 입향은, 16세 통정대부 피종남이 약 370여년 전 조선 인조조에 경북 성주군 용암면 본리리 일명 회목(檜木:야시목, 여우목)에 입향하여 3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었고 여기엔 시조제단비와 재실인 자인당이 있다.(기타 본관 파조 생략)

    分籍 : 洪川·丹山,忠州,·槐山·淸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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