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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가 백촌공파에 대한 반밖글
  • 올린이 : 정글북 ( 2016.09.14 09:59 ; From : 175.200.7.15 )
  • 조회 : 3033 회
  • 경주김씨 백촌공파에서 퍼온 글을 읽고 이들의 주장이 터무니 없다는 것은 이미 우리 일가 모두 공지의 사실이지만, 종통시비의 전말을 올려 이 들의 혹세무민을 경계합니다.

    종통시비의 단초는 백촌 선조께서 단종 복위를 주도하다가 순절하신 후, 우리 문중의 이휘(爾輝) 공, 정구(貞九) 공 등 여러분의 노력으로 200 여 년 만에 신원 복관작되고, 증직 증시 및 부조지전(不祧之典)의 은사(恩賜)가 조정으로 부터 내려오자 난데없이 김성언(조선 순조 연간의 인물)이란 자가 백촌의 사손(嗣孫)임을 자처하고 나타나 여러가지 획책을 통해 종통을 빼앗으려 한 사건으로 이미 조선 조에 옥천, 영동 등지의 관아에서 판결을 통해 김성언의 사술(詐術)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김성언이 처벌되어 종료되었으나, 10.26 사태 후 우리 문중이 어수선한 틈을 타 지난 1982년 김성언의 후손이라는 소위 경주김씨 백촌공파라는 자들이 자기들이 백촌의 후손이라며 호판공 묘비 철거의 소를 청주지법에 내면서 소송이 진행되었으나, 결국 대법원에서 김성언 일파는 백촌의 후손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아 종결되었는데, 이 들이 자기들 끼리 카페를 개설하고 아직도 허황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백촌 선조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고, 단지 200 년 전에 백촌 후손임을 사칭한 김성언 일파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의 주장이 모순된다는 것을 밝힘니다.

    1. 백촌 선조는 경주김씨가 아닙니다. 백촌의 상계를 규명해봐도 경주김씨 줄기와는 상관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조선시대 어느 경주김씨 족보에도 백촌이 입보된 사실이 없습니다.)

    2.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라는 안동권씨 성화보에도 그 들이 주장하는 백촌의 손자 김계훈 이란 자가 여병재(휘 玄錫)공의 아들로 등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김계훈의 생모라고 주장하는 여병재 공의 배위 권영금과 김계훈의 나이 차이는 5살 미만으로 권영금이 김계훈의 어머니가 될 수 없습니다.)

    3. 소위 그들이 백촌의 고손자라고 주장하는 김희년(金禧年)은 호가 완계이고 등과하여 현감, 군수,정언 등을 역임했고, 대동야승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에도 나오는 분인데 청풍김씨입니다.
    청풍김씨가 백촌의 후손일리는 만무하고, 백촌의 고손자라면 과거에도 응시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백촌의 손자라는 김계훈은 통덕랑(通德郞), 증손자라는 김자용은 성균관 생원(生員), 고손자라는 김희년은 정언(正言)벼슬을 했다고 함.)

    4.그 들의 주장에 따르면 1534년(중종 29년) 금고(禁錮)에서 풀려서 벼슬을 하였다 라는 주장도 성립하지 않는 것이 김희년은 이미 1534년 이전에 생원, 문과 초시에모두 합격하였습니다.(조선왕조실록 중종30년(乙未) 3월 신사조(辛巳條): 김희년이 구속 중에 진술한 바에 의하면 김자용이 중종 29년 전에 죽었고 그전에 생원이 된 사실 및 김희년도 중종 29년 전에 소과과거(小科科擧)와 문과초시(文科初試)에 급제한 사실이 증명된다.)

    5.조선 후기에 진행된 종통 시비에서 패소한 이들은, 더 이상 김해김씨라고 칭하면서 백촌선조의 자손이라고 칭할 수 없게 되자, 왕의 행차에 징을 치고 백촌 선조의 본이 경주인데 김해로 잘못 알아 왔으니 경주로 본을 바꾸는 것을 허락하여 달라고 호소하여 허락받았다는 허위내용의 문서를 위조한 후 경주김씨 백촌공파라고 사칭하여 족보를 만들었는데, 우리 문중의 의형(毅亨)공께서 진정하여 이들을 처벌하고 그 족보를 모두 소각하라는 판결을 각 고을에서 받았습니다.(의형 공께서 보관중인 전라도순찰사 천안 남원 익산 금산 무주 용담 진안 진산 각 고을 수령들에게 낸 소지 및 처분문)

    6.일제 시대 들어와 족보의 간행이 자유로운 것을 이용하여, 이들은 멋대로 경주김씨 백촌공파라 칭하고 족보를 간행하는 등 허황된 주장을 계속하였습니다.

    7.정말 이 들이 백촌 선조의 후손이라면, 숙종이후 단종 복위와 관련된 분들을 조정에서 신원하는 데 백촌을 신원하려는 노력을 당연히 해야 할텐데 그런 징후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휘 공, 정구 공 등의 진정으로 백촌 선조께서 신원 복관작 된후 그 후손들이 신역을 면제받고, 적몰된 가산을 돌려 받은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나 김성언은 백촌의 적손이라고 나타나 종통을 가로채려한 것입니다.

    8. 이들이 주장하는 백촌 선생 전답사출록(田畓斜出錄)은 김성언이 백촌선생의 옛 전답을 사드린 문서로서, 백촌 선생의 전답은 무상으로 반환하라는 왕명이 있었으므로 돈을 주고 샀다는 자체가 그가 백촌선생의 자손이 아님을 뜻합니다.
    그러나, 김성언은 이 전답을 점유한 자들이 권세가들이므로 돈을 주고 삼으로서 그들의 환심을 사서 우리 문중과의 소송에서 배경으로 삼으려는 것과(실제로 예조의 소송에 정모의 도움을 받음) 산 전토를 호계서원에 기증하여 우리 문중과의 소송에서 호계서원의 유생들의 후원을 받겠다는 목적이었다. 김성언이 백촌 선조의 토지를 사서 호계서원에 기증한 은혜에 보답한다고, 실제로 호계서원 최종구 이선운 등 유생들이 김성언의 주장대로 진정을 냈지만, 관(官)에서 다 배척되었습니다.

    9. 이외에도 김성언 일파가 백촌의 후손이 아니라는 증거는 여러가지 있습니다.

    예컨데,

    1). 본관이 다르다. 백촌선생은 김해김씨인데 저네들이 백촌선생의 고손자라고 주장하는 김희년(金禧年)이 청풍김씨인 사실.(국립도서관소장 대동야승(大東野乘) 을사전문록 김희년전(乙巳傳聞錄 金禧年傳), 연여실기술(燃黎室記述357쪽, 549쪽 金禧年字景老淸風人).

    2). 백촌 선생의 손자 증손자 고손자 모두 관노(官奴)로 정속되었어야 하는데 저네들이 백촌 선생의 손자라고 주장하는 김계훈이나 증손자라는 김자용이나 고손자라는 김희년중 한 사람도 관노로 정속된바 없다.(세조실록 二년 六월 병오조(丙午條), 저네들의 족보)

    3).양반은 역모로 처벌된 이의 자손과의 혼인이 금지되었으므로 백촌선조의 가까운 자손은 양반과 혼인이 금지되었었는데, 저네들이 백촌선생의 손자라고 주장하는 김계훈은 현감(縣監)벼슬을 한 양반인 신복담의 딸과 혼인하였다. 또 증손자라는 김자용은 생원으로 양반인 권시민의 딸과 혼인하였고, 고손자라는 김희년은 진사로 양반인 황겸의 딸과 혼인하였다.

    4). 백촌선생의 손자라는 김계훈의 처조부(妻祖父)는 판서(判書) 신석조(辛碩祖)인데(처종조부라는 설도 있음) 신석조는 사육신사건에 관계된 분들의 인척(姻戚)까지도 연좌처벌(連坐處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이 있슴.(만일 김계훈이 백촌선생의 손자라면 그런 주장을 못 하였을 것임).( 조선왕조실록 세조二년七월 기축조(己丑條) 및 기묘조(己卯條), 학문사간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하권462쪽.)


    5). 장적(帳籍,옛날 호적)이 현석(玄錫)공까지 연결되지 않는 점.(국사편찬위원회소장 갑진년 영동관등급)

    6). 옛 족보가 없다는 점. 사족(士族)으로 조선 중엽(中葉)까지 족보가 없는 집이 없는데 족보를 숨기고 있는 점.

    7). 호판(戶判)공과 영상(領相)공의 묘를 수호하지 않은 점. 그들은 우리의 七七보를 보고 비로소 호판공의 묘의 위치를 알았다고 한 말이 중앙일보에 실렸었다.

    8). 조정으로부터 백촌 선생의 자손이라고 인정받은바 없는 사실.

    9). 백촌 선생의 고향은 충청도 옥천인데 백촌 선생의 손자라고 주장하는 김계훈의 고향은 경상도 함양 안의(安義)다. ( 저네들의 족보마다 김계훈이 고향 안의에 돌아갔다(還歸安義)라고 쓰였다.)

    10). 지난 날 전문가들이 쓴 책에 저네들을 백촌선생의 자손이라고 쓴 바 없는 점.

    (각 백과사전, 장능지보, 전고대방, 고사대전, 1933년간 만성대동보, 1952년간 씨족 통보, 일제시대 간행된 국조인물지, 1971년간 한국성씨대관. 한국성씨대관(韓國姓氏大觀)의 경주김씨편은 경주김씨종친회 사무총장이 감수하였으나 백촌 선생의 언급이 없고 경주김씨 역대명인 명단에도 김문기선생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여러가지 정황과 증거에 의하여 김성언일파(소위경주김씨 백촌공파)의 주장은 조선 시대 부터 일축되고, 관송(官訟)에서도 기각되었으나 1982년 이들이 호판공 묘비 철거의 소를 제기해 최종 상고심에서 기각되었습니다. 이들은 패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촌의 후손임을 모칭하고 있습니다.

    우리 일가 중에도 종통 시비의 전말을 잘 모르는 분이 있으면, 첨부한 문서나 충의공파대동보 1권(224쪽)에 종통 소송사의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김녕김씨 충의공파 후손분 이신 김**님께서 경주김씨 백촌공파에 대한 반밖글 이며 저가 임의로 빌려 왔습니다

    그리고 앞쪽에 백촌공파 김모씨가 정당한 후손인냥 몇가지 글을 올려 놓았는데
    일고에 가치도 없으며 반밖글 쓰는 시간조차 아깝습니다
    김모씨가 쓴글 언제고 반밖 가능한 글이며 진실을 알고도 김모씨 글을 썼다면
    고등법원 판결문을 보면 상세히 나와 있는데 몇 글짜나 답할지 ?
    진실을 숨겨야만 하는 이가 아직도 있다니 슬픈 일이다
    정당한 후손들이 멀쩡이 살아 있는데 누가 누구보고 사이비 날조손 이라 했는가



    김녕김씨 충의공파 18세손 정글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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