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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江華) 위(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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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위씨(江華韋氏)



강화(江華)는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우리나라 다섯 번째의 섬으로 일찍이 단군신화(檀君神話)에도 등장한 유서깊은 고장이다. 아득한 옛날 갑비고차(甲比古次)라 하다가 고구려 때 혈구군(穴口郡), 신라(新羅) 시대에는 해구군(海口郡)으로 불리웠다. 그 후 940년(태조 23) 현재의 지명인 강화로 개칭되었으며, 고려시대(高麗時代) 몽고의 침임 때와 조선(朝鮮)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임시수도(臨時首都)의 역할을 하였고, 수도의 관문에 위치한 까닭으로 근세에 이르러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 1886년)·신미양요(辛未洋擾 : 1871년)·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1875년) 등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위씨(韋氏)는 중국(中國) 경조(京兆)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팽조(彭祖)의 손자가 위(韋)땅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고을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
우리나라 위씨(韋氏)는 중원(中原) 출신인 위수여(韋壽餘)가 960년(고려 광종 11) 동래(東來)하여 사선관(司膳官)을 거쳐 목종(穆宗)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현종(顯宗) 초에 치사(致仕)를 상소했으나 허락(許諾)되지 않고 궤장( 杖)을 하사(下賜) 받은 후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으로 강화백(江華伯)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강화(江華)땅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시조의 후손 근영(瑾英)이 고려 인종(仁宗) 때 소감(少監)을 역임했으며, 원(元)은 몽고(蒙古)의 내침으로 강화에 천도하는 왕(王)을 호종하여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조선조에 와서는 의령 현감(宜寧縣監)의 인동 현감(仁同縣監)을 거쳐 인천 부사(仁川府事)를 역임한 조(組)가 간신(奸臣)들의 모략으로 평안도 영유(平安道永柔)에 유배(流配)되었다가 그 곳에 정착(定着)하여 살면서 후손들이 번성하자 그를 낙향시조(落鄕始祖)로 삼고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일세조 조(組)의 9세손 관(觀)이 1689년(숙종 15)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찰방(察訪)과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지낸 후 홍성 군수(洪城郡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상소문(辭退上疏文)을 올리자 왕명(王命)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이건창(李建昌)과 함께 고군도(古郡島)에 유배되었다. 그후 풀려나와 영유(永柔)에서 일생을 마치자 후손들은 위촌(韋村) 뒷산 주마현(走馬峴)에 솟대를 세우고 그의 영광(榮光)된 유업(遺業)을 영원히 기렸다.
그외 인물로는 효행(孝行)이 뛰어나 정려(旌閭)가 내려졌단 응표(應豹)와 「백석창화집(白石唱和集)」을 남겨 문명(文名)을 떨쳤던 관식(觀植)이 유명했으며, 병식(秉植)과 달식(達植)은 광복운동(光復運動)에 신명(身命)을 바쳐 강화 위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현재 남한(南韓) 총인구 351가구 1,44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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