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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靈山) 신(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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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寧越) 
영산,영월 신씨(靈山,寧越辛氏)

영산은 경상남도 창녕군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서화현인데 경덕왕이 상약으로 고쳐서 밀성군(밀양)의 영현으로삼았고, 고려 때 영산으로 개칭하여 감무를 두었다가 조선 초에 현감(縣監)을 설치했다. 1895년(고종 32)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13년에 군을 폐하여 길곡면 사촌리는 함안군에 병합하고 나머지 지역은 창녕군에 병합하여 영산면이 되었다.

신씨의 선계는 중국 농서성 출신인 신시랑이 당나라 현종 파락사로 신라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고 하며, 고려 중엽에 중국 8학사의 한 사람인 신 경(辛 鏡)이 동래하여 1138년(인종 16)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자신이 살았던 중국 강서성 대유현에 있는 천축산과 산세가 비슷한 지금의 창녕 영취산 아래에 뿌리를 내린 것이 우리나라 신씨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 경(鏡)이 처음 정착한 영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으며, 9세손에 와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천(추밀원사 지화의 맏아들)을 파조로 하는 덕재공파와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영산부원군(靈山府院君)에 봉해진 혁(革)을 파조로 하는 초당공파, 중정대부(中正大夫) 성렬(成烈:공근의 아들)을 파조로 하는 중정공파로 갈라졌고, 지화의 세째 아들로 영월부원군(寧越府院君)에 봉해진 온(蘊)을 파조로 하는 부원군파와 이부 판서(吏部判書)를 지낸 한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의 후손들은 영월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회헌(晦憲) 안 향(安 珦)의 문인으로 스승과 함께 우리나라의 성리학을 개척한 덕재공파 천의 아들 인거가 백이정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문장과 학행으로 명망이 높았으며,충숙왕 때 정순대부(正順大夫)로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와 경주 판관(慶州判官)을 거쳐 충묵왕조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했다. 천의 8세손으로 습독을 지낸 질의 아들 경행(景行)은 선조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과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나갔다가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청난삼등공신(淸難三等功臣)으로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초당공(草堂公) 혁(革)의 후손에서는 그의 손자 예(裔)가 총혜왕 때 좌정언(左正言)과 지신사(知申事)·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지내고 총목왕 대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예의 아우 부(富)는 홍건적의 난 때 함종 전투에 출정하여 장군(將軍) 이 견(李 堅)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한편 조선 태조 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된 유정(有定)은 태종 때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고, 경원에 침입한 야인 우디거의 정벌에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도원수(都元帥) 조 연(趙 涓)과 함께 출정했다. 특히 그는 성품이 곧고 급하여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남의 일이라도 꾸짖거나 손을 대지 않고 못배기는 무인 기질이 있어 남에게 미움도 많이 샀다. 그가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 왜적은 그를 꿇어 앉히고 칼로 위협하며 기밀을 탐지하려했으나 그가 완강하게 굴하지 않자 화가 치민 왜적은 차마 목을 베지는 못하고 다리 사이의 신낭을 베었다고 한다. 유정의 아들 인손(引孫)은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문신으로 여러 대군들과 서사를 강론했고, 도승지(都承旨)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형조 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낸 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의 아들 석조(碩祖)는 세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에 등용되어 저작랑(著作郞)·직제학 (直提學)·우사간(右司諫) 등을 지내고 세조 때 공조와 이조의 참판(參判)을 거쳐 대사헌과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역임했으며 학문이 뛰어나고 문장에 능하여「세종실록」과「의방유위」·「경국대전」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던 영희(永禧:현감 수담의 아들)는 과거에는 급제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남효온(南孝溫)·홍유손(洪裕孫) 등과 함께 <죽림우사> 라 결의하고 학문에 정진하며 행의를 닦아 크게 문명을 떨쳤고, 인손의 6세손 종원(宗遠:군수 진의 아들)은 선조 때 금부 도사(禁府都事)와 연천 현감(連川縣監)을 거쳐 호조 좌랑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온(蘊)의 후손에서는 광정대부(光靖大夫)로 문하시중에 오른 중석(仲碩)과 홍주 목사(洪州牧 使)로 홍건적의 난에 공을 세워 익찬 공신(翊贊功臣)에 책록된 염(廉)의 부자가 유명했으며, 온의 6세손으로 영원군(寧原君)에 추봉된 숙거(叔据)의 아들 윤문(允文)과 윤무(允武) 형제가 뛰어났다. 이들 형제는 중종반정 때 무신인 박원종(朴元宗)과 더불어 반정행동대로 공을 세워, 형인 윤문은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영월군(寧越君) 봉해지고 아우 윤무는 정국공신으로 병조 판서와 좌찬성을 거쳐 영천군(寧川君)에 봉해졌으나 무신반정을 음모하고 있는 천인 정막개의 무고로 억울하게 대역죄를 뒤집어 쓰고 죽음을 당했다. 문하시중 중석(仲碩)의 9세손 응시(應時: 부사 보상의 아들)는 열 여섯 살에 대과에 응시하여 그 성적이 뛰어났으나, 좌의정 안 현(安 玹)은 어릴 때 재력으로 등과함으로써 불행해진 많은 전례를 미루어 그를 위해 낙방시켰다고 하며, 명종 초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와 정언을 지내고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를 한 후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선조 때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그 뒤 모친상을 당했을 때「주자대전」중에서 예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주문문례」를 편찬했으며,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와 대사간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이르렀다. 응시의 아들 경진(慶晉)은 율곡(栗谷) 이 이(李 珥)의 문인으로 선조 때 등과하여 병조 좌랑으로 진주사(陳奏使) 한응인(韓應寅)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체찰사(體察使) 류성룡(柳成龍)의 휘하에서 종사관(從事官)으로 전공을 세우고 강릉 부사(江陵府使)와 사간을 거쳐 이조 참의, 성주와 충주의 목사를 역임하여, 그의 손자로 많은 저서를 집필했던 돈독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판서 한의 후손에서는 그의 손자 비(군재의 아들)가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태자시윤을 지내고 내성군(奈城君)에 봉해졌으며, 증손 거는 충혜왕 때 등과하여 광대부(光靖大夫)로 지문하찬성사(知門下贊成使)에 이르렀고, 한의 7세손 보안(保安)은 세종 때 선공판사(繕工判事)와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역임했다. 상장군파에서는 성렬의 손자 사천(斯薦)이 고려 말에 전공 판서(典工判書)를 지내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곡강으로 낙향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조선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용궁 현감(龍宮縣監)과 성주 목사(星州牧使) 겸 판관을 지낸 희수(希壽)의 아들로 재종숙인 원에게 출계한 초(礎)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창녕의 화왕산성에 주둔한 곽재우(郭再祐)의 막하로 들어가 전공을 세우고, 현풍 현감(玄風縣監)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방비를 굳게 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성종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에 오른 균(均:증호조 판서 중선의 아들)과 명종 때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낸 윤(崙:참의 필주의 아들)이 유명했으며, 응성의 아들 경연(景衍)은 평안 도사(平安都事)를 역임하여, 광해군 때 별시문과에 장원하고 교리(校理)와 사간을 지낸 광업(光業), 인조 때 예조 정랑(禮曹正郎)을 거쳐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역임한 응망(應望), 판관 응명(應命), 현감 필형(必馨)·번(蕃) 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산·영월 신씨는 남한에 총 25,602 가구, 105,977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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